대통령실 "여론청취 뒤 방향 잡겠다"… 지지율 신경 쓰나?與 "백지화할 문제는 아냐"… 경총 "노동계, 개편안 왜곡"전문가 "노동생산성 美의 57.4% 수준… 근로자 선택권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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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을 표방한 윤석열 정부가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두고 경영계와 미묘한 온도 차를 보이는 모습이다. 노동계의 '과로' 프레임에 주무 부처의 정책홍보 부족이 겹치면서 근로시간 개편 방향이 흔들릴 가능성이 제기된다.일각에선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이 주요국보다 떨어지는 상황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대통령실은 15일 근로시간 제도개편 방안과 관련해 "주당 최대 근로시간은 노동 약자의 여론을 더 세밀히 청취한 뒤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김은혜 홍보수석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의 노동시장 정책 핵심은 MZ세대(1980~2000년대생)·노조 미가입·중소기업 근로자 등 노동 약자의 권익 보호"라며 이같이 말했다.정부는 지난 6일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확정, 발표했다. 노동부는 근로자들이 1주일에 52시간까지만 일할 수 있게 제한한 현행 제도를 고쳐 바쁠 때는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노동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를 두고 노동계와 MZ세대를 중심으로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나왔다.이에 윤 대통령은 14일 근로시간제 개편안과 관련해 참모진에 "입법 예고 기간 중 표출된 MZ세대 등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보완할 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도 15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69시간은 너무 과도한 시간으로 보인다"고 거들고 나섰다. 김 대표는 노동부의 정책홍보가 미흡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는 "(개편안) 발표와 공감대 형성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했다. 오해를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설명이 되는 바람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일각에선 청년층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정부와 여당이 근로시간 개편안을 두고 MZ세대 내 부정적 여론이 확산하자 지지율 이탈을 막기 위해 나섰다는 분석도 없잖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여론 수렴과 보완을 지시하면서 상황에 따라선 개편안과 관련해 '전면 재검토' 가능성마저 제기되는 실정이다.다만 정부와 여당은 주52시간제 개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큰 틀에서 방향성을 유지하려는 모습이다. 김 수석은 브리핑에서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은 종래 주 단위로 묶인 것을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자유롭게 노사 협의하도록 하겠다"고 언급했다.김기현 대표도 "(제도 개편을) 백지화할 문제는 아니다. 사업 성격, 규모, 하는 일의 종류에 따른 탄력성 없이 획일적으로 주 52시간에 묶는 게 때로는 현장에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한덕수 국무총리도 1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개편안 원점 재검토'와 관련해 "큰 프레임(틀)은 변화가 없다. 정책의 원점 재검토는 전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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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영계는 정부와 여당이 노동계의 '과로' 왜곡 프레임에 걸려 근로시간제 개편안을 손질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우려하는 모습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1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주요 기업 인사·노무 담당 임원회의를 열고 근로시간제 개편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참석자들은 근로시간을 유연화하는 정부안이 산업 경쟁력은 물론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특히 정부안은 근로자 대표나 노조의 합의가 있어야 연장근로 변경이 가능한 데도 노동계가 마치 기업이 무조건 추가 근로를 강제해 과로를 조장하는 것처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근로시간제도 개선 취지를 왜곡하는 내용에 대해 우려한다"며 "앞으로 경영계의 노동개혁 방안을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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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경제전문가는 근로시간제 개편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생산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21년 기준 42.9달러다. 주요 5개국(G5)과 비교하면 미국(74.8달러)의 57.4%, 독일(68.3달러)의 62.8%, 프랑스(66.7달러)의 64.3%, 영국(59.1달러)의 72.6%, 일본(47.3달러)의 90.7% 수준이다.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회원국 37개국 중 29위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OECD는 지난해 내놓은 2022 한국경제보고서에서 대-중소기업 간 생산성 격차와 생산성이 낮은 중소기업에 대한 과도한 지원 축소 등을 권고한 바 있다.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OECD 내에서 바닥권"이라면서 "생산성이 낮은데 근로시간마저 줄어들면 피해는 노동자가 본다. 수입이 줄면 근무시간이 끝난 후 대리운전이나 음식배달 등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근로시간을 일률적으로 줄이면 급여는 똑같이 받으면서 일하는 시간은 줄어드는 대기업 근로자만 좋은 것"이라고 지적했다.이 교수는 "근로시간 규제라는 것은 기업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근로를 강제하는 게 문제이지, 근로자가 선택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며 "미국은 사무직의 경우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받지 않고 영국도 근로자가 통보하면 연장근로에서 제외해 준다. (우리는) 천편일률적으로 (근로시간을 강제)하니 연구·개발(R&D)이 많은 삼성조차 오후 6시가 되면 (사무실·연구실의) 불이 다 꺼지는 나라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주 69시간제라는 표현부터 잘못된 것"이라며 "일이 몰리면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인데 마치 (누구나 의무적으로) 69시간을 일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