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IB "예산 승인 지연 장기화 하방 위험"한투연 "예산안 통과 지체는 민생 해악 행위"전문가 "협의 통해 예산안·민생법안 처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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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과 탄핵정국으로 한국 경제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였다. 가뜩이나 내수 침체가 뚜렷한 상황에서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온 수출마저 경고등이 켜졌다. 내년, 내후년 1%대 저성장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로 경제 하방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불안정한 국내 정세가 원·달러 환율과 대외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어, 경제 문제에서만큼은 여야 정쟁이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정국으로 한국 경제가 '시계제로' 상태에 빠졌다. 국회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폐기된 데 따른 정국 혼란으로 입법 절차와 예산 논의도 전면 중단된다. 정부가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노동·교육·연금·의료 개혁 동력도 동력을 잃게 됐다. 정부 역점사업들도 후순위에 밀려나게 됐다.더욱이 더불어민주당은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4조1000억원 삭감하기로 한 데 이어 7000억원 규모의 추가 삭감까지 시사했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상황을 반영해 대통령실과 통일부 등 예산을 더 깎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 정부 예비비, 검찰·경찰, 감사원 등의 특수활동비, 대왕고래 프로젝트 예산이 삭감된 내년도 감액 예산안이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성명서를 내고 "대통령 탄핵 없이 예산안 협의는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다만 민주당 내부에서도 추가 삭감은 무리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무기로 감액 산안을 밀어붙이려 한다는 비판 여론이 잇따른다. 국민의 힘이 '보복성 예산 삭감'으로 반발하며 맞불을 놔 여야 강대강 대치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감이 번진다.정부는 내년 예산안 등 경제문제만큼은 여야가 한목소리를 내줄것을 호소하고 나섰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8일 관계부처 합동 성명문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내수를 회복시켜 취약계층에 온기를 전하고 글로벌 산업전쟁 속에서 기업이 활로를 찾을 수 있도록 경제문제만큼은 여야와 관계없이 조속히 처리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며 "2025년 예산안이 내년 초부터 정상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신속히 확정해 주시길 요청한다"고 말했다.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 주력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약화한데다 국가 대외신인도 하락까지 겹치며 수출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정치적 리스크 발생은 대외 신인도 하락으로 한국 교역 조건을 악화킬 것"이라고 우려했다.금융시장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 무산으로 탄핵 대치 정국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증시가 연중 최저 수준으로 추락한 것이다. 9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78% 하락한 2360.58로 마감했다. 지난해 11월 2일(2343.12) 이후 최저점이다. 코스닥도 전일 대비 5.19% 급락한 627.01에 장을 마쳤다. 코스닥 역시 연중 최저가를 경신했다.원·달러 환율도 원화 약세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모습이다.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도 전 거래일보다 17.8원 오른 1437.0원에 상승 마감했다. 2022년 10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외환시장 불안으로 환율 방어에 쓰이는 한국 외환보유액도 4000억달러 선에 근접해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11월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53억9000만달러다. 비상계엄 사태·탄핵 정국으로 원화 약세 압력이 커지고 있어 이 추세대로라면 2018년 이후 6년여 만에 4000억달러 선이 붕괴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환시장에서는 환투기 세력이 시장을 교란할 가능성이 커지는 반면 외환당국이 개입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해외 투자은행(IB)에서도 한국의 투자 비중 축소를 권고하는 등 '코리아 밸류다운'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모건스탠리는 "정책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탄핵 가능성과 대통령 교체가 내수와 투자 활동의 하방 리스크를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골드만삭스도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시장 평균보다 낮은 1.8%로 유지하지만 리스크는 점점 더 하방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내다봤다. 권구훈 골드만삭스 선임이코노미스트 "정치적 불안정성이 성장에 의미 있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2016년과 2006년의 두 건의 탄핵 사건 때와는 다르다"며 "2025년 한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닌 국가들과 함께 중국 경기 둔화와 미국 무역 정책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외부 역풍에 직면해 있다"고 짚었다.홍콩계 증권사 CLSA는 "한국 주식은 추가적인 정치 리스크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내년 한국 시장 비중을 줄이고 매도 시기도 앞당겨야 한다"는 투자의견을 냈다. 바클레이즈 역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한 반발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고 내년도 예산 승인 지연이 장기화할 경우 내수 회복에 잠재적 하방 위험이 존재한다"며 "정치 경제적 불확실성이 외국인 자금 흐름과 원화 약세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예산안과 더불어 국내 산업 지원 법안들도 여야 정쟁에 뒤로 밀리고 있다. 국가기간 전력망 특별법, 반도체 특별법,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원전산업지원 특별법 등이 대표적이다. 여야가 합의한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와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도 소득세법 개정안 처리가 차일 피일 미뤄져 내년 1월 1일부터 관련 과세가 이뤄질 수 있다.이에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긴급 성명서를 내고 "국회의원은 모든 국민의 대표 자격으로 정부 예산안을 심의 확정할 의무가 있다"며 "국회의원의 임무를 망각한 채 당리당략을 앞세워 법정 기한을 넘기고 예산안 통과를 지체시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경제 침체를 부추기는 민생 해악 행위"라고 성토했다.정 대표는 "미국으로 빠져나간 자금과 부동산에 잠긴 자금이 국장(한국 증시)으로 서서히 돌아오게 할 첫 단추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라며 "여야는 오는 10일 수정 예산안 및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통과로 정치가 아직 살아있음을 국민 앞에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전문가들도 계엄 사태와 탄핵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지만 내년도 예산안과 각종 민생법안 처리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 경제에서 최대 리스크는 정치적 불확실성"이라며 "여야가 전향적인 자세로 협의에 나서 예산안과 민생법안 처리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김명실 iM증권 연구원은 "당장 예산안 등 경제 및 정책현안 처리가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자본시장법 개정 등 법안들의 향방도 불투명해졌다"며 "정치 리스크 확대로 재정 불확실성이 높아졌다"고 지적했다.여당도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결단에 나서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 예산안 자체가 상당히 긴축적이어서 증액이 이뤄져야 하는데, 주도권을 가지고 협상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게 문제"라며 "정치적 문제가 해소되어야 순차적으로 나머지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 상황으로 여당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며, 내년 초 구체적인 민생 대책 등이 나와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