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연 산부인과의사회장 "저수가와 처벌 공포가 만든 생존형 탈출 … 마취 실명제 필요"취약한 의료체계 민낯, 마취의 떠난 후 40대 환자 3개월째 의식불명 사건 韓 마취 수가 미국의 1/29 … 병원도 의사도 수술실 지킬수록 손해 보는 구조 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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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수술실에서 발생한 40대 환자의 심정지 사고는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민낯이 드러난 '예견된 참사'에 가깝다. 팔꿈치 수술을 위해 마취된 환자가 홀로 방치된 사이 마취과 의사는 "프리랜서라 바쁘다"며 수술복을 벗고 다음 병원으로 떠났고 집도의는 아직 입실조차 하지 않았다. 등대지기 없는 수술실에서 골든타임을 놓친 환자는 3개월째 어둠 속에 갇혔다.

    29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회장은 "이 비극을 단순한 개인의 과실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번 사고는 의료의 기초 인프라인 마취통증의학과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며 그 배후에 숨겨진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직격했다.

    마취과 위기를 앞장서 설파한 이가 다름 아닌 산부인과 의사들의 수장인 김재연 회장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마취과의 붕괴는 단순히 한 과의 문제를 넘어 '분만 인프라의 동반 침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산부인과 의사가 마취과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마취과 의사가 없는 분만실은 수술실이 아니라 그저 위험한 빈 방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24시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응급 분만 현장에서 마취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분만실 문을 닫는 지방 산부인과가 속출하고 있다"며 마취 의료의 공백이 결국 산모들의 '원정 출산'과 직결되는 필수의료의 공동 운명체임을 강조했다.

    ◆ '메뚜기' 마취 부추기는 15만원의 비극 

    중소병원들이 마취과 전문의를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고 건당 호출하는 프리랜서에 의존하는 근본적 배경에는 처참한 수가 체계가 자리 잡았다. 

    심장 수술 1시간당 마취 수가가 한국은 15만원인 반면 미국은 454만원에 달한다. 원가 보전율이 72.7%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병원은 마취 전문의를 고용할수록 적자가 커지는 구조에 직면해 있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병원은 상주 의사 대신 '알바'를 쓰고 프리랜서 의사들은 낮은 단가를 보전하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며 환자가 깨기도 전에 자리를 비우는 위험한 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미국의 29분의 1에 불과한 수가를 방치하면서 환자의 안전을 바라는 것은 국가의 기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대학병원 교수도 짐 싸는 현실 … 마취 실명제 도입 

    이러한 모순은 상급종합병원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병원에서조차 최근 사직한 마취과 교수 5명 중 3명이 프리랜서 시장으로 발길을 돌린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김 회장은 "24시간 당직과 고위험 마취를 감내해도 보상이 개원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현실이 대학병원의 명예를 짓밟고 있다"며 "숙련된 교수들이 수술실을 떠나면서 암 수술과 심장 수술이 지연되는 국가적 재난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설상가상으로 불가항력적 사고에 대해서도 의사에게 과도한 형사 책임을 묻는 사회적 분위기는 인력 유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김 회장은 "마취 사고가 영구적 장애나 사망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 만큼 법원이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며 "이러한 공포가 전문의들을 안전한 통증 클리닉이나 미용 성형가로 등 떠밀고 있다"고 꼬집었다.

    결국 이번 강남 수술실 사고는 개별 의사의 도덕성 비난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수술실의 불을 다시 밝히기 위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의 신호탄으로 삼아야 한다고 중론이다. 

    김 회장은 "중증·응급·산과 마취 수가를 선진국 수준으로 인상하여 병원이 마취의를 상주시킬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고 포괄수가제 내 마취료를 별도 산정하는 등의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마취를 시행한 의사의 면허번호를 청구 시 반드시 기재하는 '마취 실명제'를 도입해 무자격자 마취를 근절하고 고의 없는 과실에 대해 형사 처벌을 면제하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