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최고가격 지정 준비 마쳐" … 내용·방식·시점 '깜깜'美 닉슨 정부 '긴급 석유 할당법' 전국에 '가스 라인' 현상공급 왜곡·사재기 부작용 불가피 … 정유사 손실보전 책임도
  • ▲ 미국의 이란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치솟으며 전국 휘발유 평균가격이 1900원을 넘긴 9일 2600원에 육박하는 가격표를 내건 서울 강남구의 한 주유소. /뉴시스
    ▲ 미국의 이란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치솟으며 전국 휘발유 평균가격이 1900원을 넘긴 9일 2600원에 육박하는 가격표를 내건 서울 강남구의 한 주유소. /뉴시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 도입 검토에 나섰다. 시행될 경우 외환위기이던 1997년 이후 29년 만에 정부가 석유 가격에 개입하게 된다. 사실상 시장 자율에 맡겨졌던 가격 결정 구조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점에서 시장 왜곡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9일 이재명 대통령이 주대한 중동 상황 관련 비상경제점검회의 직후 가진 청와대 브리핑에서 “이번주 내로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유류세 인하 등 유류 소비자에 대한 직접 지원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회의에서 이번 주 안으로 최고가격제 시행을 위한 고시 개정 절차를 진행할 것을 산업통상부에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실장은 "실효성 있는 제도 시행을 위해 담합이나 세금 탈루 등 시장 교란 행위가 없는지 공정위와 국세청이 면밀하게 들여다볼 것”이라고 했다.

    또 “이 대통령이 유류세 인하 폭 확대, 유류 소비자에 대한 직접 지원 등 경제주체의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에 대해 폭넓게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전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5일 중동 정세 악화로 에너지 수급 우려가 커지자 오후 3시부로 석유·가스에 대해 1단계인 '관심' 단계의 위기경보를 발령했다.

    위기경보는 국제유가 급등 상황에 따라 ‘관심-주의-경계-심각’ 등 4단계로 구분된다. ‘에너지수급 비상시 위기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두바이유 가격이 5일 연속 각 단계별 기준을 충족할 경우 발령된다.

    관심 단계는 배럴당 90~100달러 구간으로, 수급 불안이 우려될 때 발령된다. 주의 단계는 100~130달러, 경계 단계는 130~150달러로, 과거 최고치인 147달러에 근접한 초고유가 상황이다. 심각 단계는 150달러 이상으로, 2차 석유파동에 준하는 경제적 충격이 예상될 때 발령된다.

    이날 국제유가가 심리적 저항선인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국제유가는 이날 한 때 배럴당 120달러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정부의 시장 경고로 상승 폭 자체는 다소 둔화됐지만 국제 유가가 치솟고 있어 기름값 상승 흐름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897.7원, 경유 가격도 ℓ당 1920.1원으로 2.3원 상승하며 2000원에 육박할 수준으로 치솟았다.

    1970년대 오일쇼크 주유 대란 재현 우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의 만성적인 품귀 현상과 주유 대란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최고가격 지정제’를 검토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위기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개입에 따른 시장 왜곡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실제로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을 때, 중동 산유국(OPEC)의 원유 수출 금지 조치로 국제유가가 급등했다. 이에 미국 닉슨 행정부는 물가 상승 억제와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긴급 석유 할당법(Emergency Petroleum Allocation Act of 1973)’을 제정해 국내 원유와 석유 제품에 가격 상한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장 균형 가격보다 낮은 수준으로 기름값을 통제하자, 소비자 수요는 폭증한 반면 정유사들은 이윤이 나지 않는 가격에 공급을 꺼렸다. 그 결과 주유소마다 기름이 동나고, 소비자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 ‘가스 라인(Gas Line)’ 현상이 미국 전역에서 벌어졌다.

    석유 부족이 심각해지자 차량 번호판 끝자리 홀·짝에 따라 주유 가능한 날짜를 제한하는 배급제가 시행되기도 했다. 시민들은 주유를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거나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포기해야 했고,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 낭비로 이어졌다.

    이러한 풍경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정부는 마스크 공급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활용한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한 바 있다. 만약 정부가 석유 최고 가격제를 강행하면 정유사는 마진을 넘어서는 가격 이하로는 물량을 내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일선 주유소 역시 소매 판매를 중단할 공산이 크다.

    약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던 마스크가 코로나 팬데믹 시작과 동시에 씨가 말랐던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는 얘기다. 주유 대란이 벌어지면 과거 마스크 5부제처럼 주유소 이용을 요일제로 강제할 수 있고, 이럴 경우 몇시간씩 줄서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마스크 5장만 손에 쥐고 나오는 촌극이 주유소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서울시 한 일선 주유소 운영자는 "발주 단가가 하루하루 널뛰고 있어 한번에 많은 양을 주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주유소 재고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라 일방적인 가격 상한제가 시행되면 차라리 당분간 문을 닫는게 나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 ▲ 바레인 시트라 섬에 있는 국영 석유공사의 정유 시설이 이란 드론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바레인 시트라 섬에 있는 국영 석유공사의 정유 시설이 이란 드론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판 주유 대란 가능성 커 … 정부재정으로 손실 보전 가능성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면서 국내에서도 주유 대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검토 중인 ‘석유 가격 상한제’가 단기적으로 소비자 부담을 줄일 수는 있지만, 공급 왜곡과 사재기 등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는 가격 상한제가 도입될 경우 상한선 설정이 시장 상황을 좌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너지연구 위원 석유 경제학 박사는 “가격 상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며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상한을 두면 정유사 입장에서는 국내 공급을 하지 않고 물량을 수출로 돌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반대로 원가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초과 이윤을 충분히 보장하는 가격 상한을 두면 정책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결국 정상 이윤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서 초과 이윤을 어느 정도 보전해 주는 방식으로 상한이 설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 입장에서는 초과 이윤을 최대한 억제하고 원가에 가까운 수준으로 상한을 두는 것이 정책 목적에 부합하겠지만, 정유사 입장에서는 수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40% 이상의 마진이 기회비용이 되기 때문에 국내 공급 물량을 최소한으로만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현재는 기름이 충분해 주문만 하면 공급되는 상황이지만, 내수 공급 물량에 대한 초과 이윤을 정부가 제한하게 되면 국내로 들어오는 물량 자체가 지금처럼 여유롭지 않을 수 있다”며 “이 경우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주유소를 찾아 이동하게 되고 특정 주유소에 차량이 길게 줄을 서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배급제 시행 시 되팔기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다만 연료를 받아 다시 판매해 차익을 얻는 행위는 현행법상 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