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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문갑식 사회부차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현 정권과 언론의 불편한 관계는 이제 뉴스 축에도 끼지 못한다. 기회만 있으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돌아가며 독설을 퍼부었고 특히 조선·동아일보 등 ‘비판언론’을 향해서는 수모에 가까운 언사(言辭)를 안겨줬다.
그런데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이 24일 돌연 언론을 ‘국정 4륜(輪)’이라 치켜 세웠다. 이 ‘수상한 칭찬’이 왜 나왔는가 싶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다. 최근 도박게이트로 확산되고있는 ‘바다 이야기’ 사태에 언론도 책임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 꺼낸 것이다.
이 실장은 “언론에서 1주일 새에 갑자기 이 문제가 불거져 터졌는데 갑자기 돌출한 사안은 아니지 않느냐. 언론이 국정4륜의 한 축으로서 사회 감시 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론학 교과서에 기록될 일”이라고 결론냈다.
정권 전체가 아예 작심했는 지 같은 날 열린우리당 김한길 대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전에 경고음을 제대로 울리지 못한 대부분의 언론들도 사회적 기능을 다했는 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각자 역할을 했으면 시끄러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정권의 핵심 인사들의 본말(本末) 뒤집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날 두 사람의 말은 ‘사실 호도’의 전형으로 가히 ‘언론학 교과서에 기록될만하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성인오락실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은 올해 7월3일 조선일보 A8면 ‘오락실 상품권 남발…10개월 새 21조’기사였다. 그 며칠 뒤인 7월8일 조선일보는 ‘성인PC방 잘못가면 전과자됩니다’라며 재차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어 7월12일 한국일보가 ‘대한민국은 도박 중’이라는 시리즈를 시작했으며 ‘게임시장 도박이 키웠다?’(한국경제·7월17일) ‘대한민국은 도박 중?”(매일경제·7월24일) ‘비상등 켜진 도박공화국’(한겨레신문·7월26일) 등 관련 보도가 잇따랐다.
그렇다면 언론이 도박의 ‘늪’에 빠져 신음하는 사회에 주목한 게 7월부터의 일인가? 그렇지 않다. 올 1월 디지털타임즈는 ‘성인용 경품게임시장’이란 시리즈를 4회에 걸쳐 보도했는데 여기에는 최근 문제되는 상품권 편법 환전 등이 고스란히 적시돼있다. 문제는 언론이 아니라 언론의 계속된 지적에 둔감하게 반응한 정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언론은 뭐했냐”가 아니라 “언론의 지적을 받은 정부는 뭐했냐”다.
바다이야기로 상징되는 성인오락이 단순하지 않고 ‘게이트화’할 수 있다는 정황을 언론이 포착한 시점은 한달도 더 된다. ‘실세(實勢) 누가 개입돼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파다했고 대부분의 언론은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 입에서 “내 임기 중 생긴 문제는 성인오락…”이라는 ‘고백’이 나왔고 그 때부터 이 사안이 수면 위로 전면 부상한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수많은 회사, 어지러운 법률과 제도가 가로막고 있지만 언론의 관심은 세가지다. 시중에서 흘러다니는 말 처럼 권력 실세나 측근들이 개입돼있는가, 도박공화국을 만든 게 누구인가, 서민만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다.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언론은 끝까지 진실을 추구해 잘못한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