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노재현 논설위원이 쓴 '대통령에게까지 버림받은 KBS'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KBS로서는 무척 억울할 것이다. 봄에는 오 동지요 가을엔 오 막돌이라 했던가. 염량세태(炎凉世態)가 따로 없다. 언제는 "방송이 없었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는가"라더니 지금 와서 "KBS가 공공기관운영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은 자사이기주의와 전파 남용의 예"라고 혹독하게 몰아친다. 그동안 낯 뜨거운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대통령과 정권을 위해 할 만큼 했는데. 견마지로(犬馬之勞)가 따로 없었는데.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입장에선 거꾸로 "브루투스, 너도냐"라는 심정일지 모르겠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딴죽을 건 프로그램이 그렇지 않았을까. 방만한 경영에다 잇따르는 횡령사고에도 불구하고 "돈만 대고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마라, 내 맘껏 놀아보겠다"는 식의 특집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황금시간대에 틀어대니 대통령이 혀를 찰 법도 하다.

    나는 "KBS가 공공기관운영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것이 언론 자유 독립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노 대통령의 말이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옳다고 생각한다. 다음달 시행될 이 법은 KBS를 비롯한 공공기관들의 방만한 경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KBS의 '미디어포커스'(3월 3일)는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참여정부 임기 말에 와서 공영방송을 다시 법적으로 정부의 통제하에 두는, 즉 방송의 독립성을 20년 전으로 후퇴시키는 법안이 느닷없이 만들어졌습니다. 1987년 6.10 항쟁의 주역들이 대거 참여한 참여정부가 공영방송의 틀을 전두환 정권 시절로 되돌려 놓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KBS가 지난 20년간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켜 왔다는 말일까. 알아보려고 멀리 갈 것도 없다. 언론학회가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성을 잃었다"고 평가한 3년 전의 탄핵 관련 보도를 상기하면 된다.

    2004년 3월 12일 밤 9시 뉴스. 앵커가 "지금부터는 국민들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탄핵 찬반을 떠나 국민을 무시한 정치권에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고 운을 떼자 기자가 나서서 "몸싸움 끝에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경악과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라고 받는다. 이어 "이게 나라를 위해 그런 것인지 자신들의 뺏겨온 기득권을 위해 그런 것인지""의원들 정말 너무한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국민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등 탄핵을 성토하는 시민들의 멘트가 이어진다.

    다음날인 13일 밤 9시 뉴스. 제목은 '권한 정지 노 대통령, 학습에 전념'이다. 제목에도 애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노 대통령은 탄핵소추안 처리 과정을 보고 정말 가슴 아프고 미안했다며 다친 의원들은 없는지 물었습니다…탄핵받게 되니 힘들다, 그러나 어렵다고 원칙을 버리면 퇴보한다며 역사와 국민을 믿고 가자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간 중계차로부터는 "광화문 일대가 거대한 촛불의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라는 보도가 이어진다.

    이런 행태에 대해 그야말로 '탄핵 찬반을 떠나' 지나치게 편파적이라는 비판이 일자 KBS는 다시 9시 뉴스를 통해 "탄핵 찬반을 '기계적 중립'에 입각해 보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취지의 주장들을 내보낸다. 어설픈 방어막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영진이 바뀌고, 짐짓 반성하곤 했지만 많은 국민이 KBS를 믿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참 딱한 노릇이다. 아무리 철 따라 포장을 달리해도 국민은 벌써 친정이나 외가나 처가나 그게 그거라는 걸 꿰뚫어 본다. 이런 판국에 돈은 더 챙기되 씀씀이는 내 마음대로라고 부르짖으니 도대체 먹혀들 소리가 아니다. 국민이 낸 수신료를 더 잘 쓰겠다며 직원을 3700명, 1200명씩이나 줄이는 BBC NHK를 본받기라도 한다면 또 모르겠다.

    KBS가 노 대통령에게까지 비판받는 까닭은 단순하다. 독립성과 방만함, 그리고 공정성과 정파성을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한국인의 희망'일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약 한나라당이 다음 정권을 잡을 경우 KBS가 또 반지빠르게 후닥닥 변신할까봐 벌써부터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