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 '경제초점'에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평생 누구를 고발해 본 적이 없고 고발당한 적도 없지만, 요즘은 고발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감추어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대통령 후보들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내년의 한국경제는 추세와 순환 측면에서 모두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추세를 볼 때 한국경제는 10년 이상 성장잠재력 저하라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또한 순환 측면에서 볼 때 수년간 지속되었던 세계경제의 호황기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이제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경제가 호황일 때조차 세계경제의 열등생으로 전락하였던 한국경제가 이제 불황기를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들은 어려운 상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후보들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이런 절박한 현실인식에 기반한 정책이 아니라 온통 장밋빛 공약들이다.

    이명박 후보는 기업규제 완화와 정부 효율성 제고 그리고 경부운하 건설을 통해 향후 10년간 7%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10년 후에는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비전은 일자리 부족과 매출 부진의 시름에 떨고 있는 민초들에게는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 후보가 행정가로서 보여준 추진력을 감안하면 이 후보의 비전은 꼭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된다.

    이회창 후보는 안정적인 6% 성장을 주장하면서 공정한 경제와 따뜻한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규제완화와 감세를 통해 경제를 살리면서도 중소기업의 나라를 만들고, 저소득층의 복지를 강화하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이 또한 지난한 삶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많은 서민과 중소기업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이다.

    정동영 후보는 가족행복시대와 통일경제를 강조하며 또한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만드는 상생경제의 실천을 주장하고 있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통일문제를 단지 이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후보와 차별화된다. 정 후보의 공약대로라면 모두가 잘사는 나라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각 후보가 제시하는 세부정책들을 보면 이러한 희망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약이야 그야말로 공약일 뿐이라고 하자. 그나마 후보들에게 기대를 걸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육성으로 직접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후보들의 메시지도 그들의 비전이나 공약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후보들은 경제정책에 관한 한 대부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공약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들이 말하지 않는 현실들을 고려하면 잿빛 절망인 경우가 많다. 고통스럽지만 정부의 규모를 어떻게 줄일지를 말해야 한다. 표가 떨어질 줄 알지만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꿀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꺼내기는 어렵지만 이제 중소기업은 보호와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력 제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

    조금만 참으면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약속보다, 힘들겠지만 기대수준을 낮추어서 아주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보자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집단적인 반발이 예상되지만 이익단체들의 이기적인 주장을 나무라는 쓴 소리를 해야 한다.

    내가 제시하는 정책이 친기업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나는 친기업이 아니라는 옹색한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 재정의 어려움과 인구구조의 급속한 고령화를 고려할 때 지금은 복지예산 지출 증가율의 속도를 완화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여야 한다.

    장밋빛 구호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후보, 이게 이번 선거의 판단기준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대선후보들을 고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