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9일자 칼럼, 이 신문 김종수 논설위원이 쓴 <산업은행 민영화를 왜 미루는 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경제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둔갑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경제위기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우리 정치인들은 흡사 절호의 기회라도 잡은 양 그 유별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수도권 규제를 풀어 경제를 좀 살려보자고 하면 대뜸 ‘수도권 대 지방’의 정치적 대결구도를 만들어낸다. 그러곤 경제를 살리자는 취지는 아랑곳없이 무작정 반대부터 하고 본다. 수도권 규제를 풀면 지방이 죽는 게 정말인지, 수도권의 발목을 잡으면 지방이 살 수 있는지를 찬찬히 따져볼 생각은 아예 없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반대하고 보자는 야당은 그렇다 치고 사정을 좀 알 만한 여당마저 야당의 흑백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질 못한다. 그런 걸 ‘정치’라고 우기면 할 말은 없지만 그 바람에 죽어나는 나라 경제와 국민들이 딱할 뿐이다.

    이 정치판에선 모든 게 '정치논리'로 재단되고 자신들의 정치적 득실로 계산된다. 국민의 이익이나 국익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자신과 지역구의 이익이라는 좁은 시야에 갇혀 국가적 운명이 걸린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거나 왜곡하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꼭 필요한 각종 민생법안이 아무리 쌓여도 우리의 국회의원님들은 그저 태평이다. 그 법안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절실하지 않은 한 아쉬울 이유도, 서두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수도권 규제 완화나 세법 개정 같은 정치화된 이슈는 그나마 거론이라도 되니 다행이다. 적지 않은 법안이 정치판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폐기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산업은행 민영화 관련 법안이다. 산업은행 민영화는 이 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내세운 핵심 과제의 하나였다. 공기업 민영화의 상징이요, 금융산업 개편의 시금석이었다. 그러나 이제 산업은행 민영화 법안은 여당에서조차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민영화 계획을 백지화한다는 얘기가 여당 정책위의장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올 정도다.

    사실 산업은행 민영화가 의원들의 눈에 다급한 현안으로 비칠 리 없다. 수도권 규제 완화처럼 지방 민심에 불을 지를 사안도 아니요, 세법 개정처럼 빈부 갈등에 기름을 부을 일도 아니다. 여기다 산업은행이 인수하려던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일이 더 꼬이고 말았다.

    민영화된 산업은행을 국제적인 투자은행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 초장부터 어긋나버린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형 공기업의 민영화, 예를 들면 산업은행 민영화는 지금 하면 손해 볼 것 같다”고 말한 것도 민영화 백지화 주장을 부추겼다. 이 대통령의 말은 ‘금융위기로 자산 가치가 폭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민영화하다 보면 헐값에 팔 수밖에 없으니 시장 상황을 보아가며 매각 시점을 잡는 게 좋겠다’는 정도의 뜻일 게다. 내용이야 전혀 틀릴 게 없다. 문제는 이를 빌미로 산업은행 민영화 작업을 중단하고 시장이 안정된 이후에나 검토해 보자는 식으로 논점이 뒤바뀐 것이다. 민영화 준비를 해놓고 파는 시기를 늦추자는 얘기를 아예 민영화 작업 자체를 미루자는 것으로 곡해한 것이다.

    여당의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산은의 민영화 연기 이유로 민영화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가 마련한 민영화 방식은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부분을 떼어 한국개발펀드(KDF)로 분리하고 나머지 민간과 경합하는 금융사업을 지주회사 형태로 재편해 매각하겠다는 것이다. 임 의장은 계획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민영화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자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민영화 계획을 만들 때는 무얼 하다가 이제 와서 반대하는지가 궁금하다. 혹여 지역구의 이해와 공기업 노조의 민영화 반대 논리에 휩쓸려 공기업 민영화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산은의 매각 시점을 늦출 수는 있다. 그러나 민영화의 틀을 지금 잡지 않으면 민영화는 영영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