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자 동아일보 오피니언면 '동아광장'에 이 신문 변희재 객원논설위원이 쓴 '방송 귀족들에 빼앗긴 영상세대의 꿈'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경제위기 탓에 광고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방송사의 경영이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KBS 정도만이 올해 연봉을 동결하고 5년간 10% 감원의 경영개선안을 발표했다. 경영 효율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진 SBS는 그렇다 쳐도 간부가 평사원보다 많은 MBC에서는 구조조정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경영이 어려울 때마다 고통을 전담하는 방송계 피라미드의 최약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외주제작업체와 방송작가들이다. 한 외주제작사의 PD는 “최근 방송사들이 자체 제작을 대폭 늘리면서 외주업체가 줄줄이 잘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간 놀고먹던 방송사 인력들이 제작비 절감을 위해 이제야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2007년 문화관광부에 신고된 외주제작업체 수는 851개, 총인원은 1만5000여 명이다. 이들은 지상파 외주제작 의무편성비율에 따라 총 방송시간의 40%를 담당한다. 그러나 외주제작업체들은 “방송사들이 편한 스튜디오 제작물은 자체 제작하고 주로 현장에 나가야 하는 힘든 프로그램들만 외주에 전담시킨다”고 비판한다. 대한민국 방송의 주역은 정치꾼 방송노조가 아니라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젊은 외주 PD들, 그리고 대본작업은 물론 섭외 등 모든 일을 다 하는 젊은 방송작가들이었던 것이다.

    외주사 권익 외면하는 방송노조

    약자와 서민을 보호하겠다고 노래를 불러대는 방송노조가 이제껏 방송 권력에 착취당하는 외주업체와 작가들의 권익을 주장한 바는 없다. 방송노조가 지지했던 KBS 정연주 전 사장이 외주업체 제작비를 일방적으로 40% 삭감했을 때도 그들은 침묵했다. 더구나 희생양이 된 외주업체 PD들의 모임인 독립PD협회 소속 386세대들이 정 사장 사수 투쟁에 앞장서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들은 이번에도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신문이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라며 방송노조를 지원하고 나섰다. 흑인이 백인의 밥그릇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격이다. 방송 권력의 외주업체 장악은 경제 영역을 넘어 정신의 영역까지 파고든 것이다. 이른바 노예근성이다.

    2030 젊은 외주 PD들과 작가들이 방송 권력에 맞서지 못하는 이유는 지상파 3사의 독점구조가 영원불변할 것이라는 패배주의 때문이다. 외주 PD와 방송작가들로서는 더 많은 지상파 방송사, 더 많은 종합편성채널이 열리면 열릴수록 유리하다. 방송콘텐츠에 투자를 한다면 그 주체가 대기업이든 신문사든 무슨 관계가 있는가. 특히 새롭게 시장에 진입할 방송사라면 불필요한 인력을 직접 고용하지 않고 창의적 외주업체에 제작을 맡기면서 스스로는 편성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기존 방송사들 역시 이런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외주 콘텐츠 시장은 대폭 활성화된다. 스타 외주 PD와 스타 작가들을 잡기 위해 방송사 간에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온다. 콘텐츠의 천국 미국의 방송구조가 이렇다.

    지금의 2030세대는 영상세대라 불렸다. 방송사가 취업시장의 꽃이 된 것도 이들 영상세대의 잠재적 가능성 덕이었다. 그러나 지상파 3사의 독점구조가 변하지 않으면서 영상세대는 두 부류로 갈라졌다. 대학시절 카메라 한 번 만지지 않고 상식과 토익을 달달 외우면서 방송 3사에 입사한 귀족들과 제작능력은 탁월하지만 학벌이 안 돼서, 토익점수가 낮아서 외주시장에 던져진 서민들이다.

    모든 방송정책은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와 능력 있는 서민 영상세대의 편에서 마련돼야 한다. 안타깝게도 방송법 개정안의 주체인 한나라당조차도 한 번도 외주업체와 작가들의 권익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대기업에 방송을 넘기려 한다는 비판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영상세대와 약자에 대한 감수성 부족 탓이다.

    지상파 3사 독점구조 깨야 산다

    공청회 한 번 없이 밀어붙이던 방송법 개정안 상정은 방송 귀족들의 저항에 좌절됐다. 그렇다면 외주업체와 방송작가까지 포함해 새롭게 논의를 시작할 때이다. 방송 귀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파업 현장에 끌려다니는 젊은 영상세대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열린 장을 만들자. 그리고 방송노조와 정치패거리로 묶여 귀족을 위한 투쟁에 나서고 있는 386세대 외주 PD들은 후배들을 위해 길을 비켜 달라. 386세대의 표현 그대로 역사 앞에 부끄럽지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