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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김일성-박헌영 테스트...답안지 보고 꼭두각시로 김일성 선택
1946년 무렵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 앞에 불려갔다. 스탈린은 시험문제를 냈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지를 써서 스탈린에게 제출하였다. 스탈린은 읽어본 뒤 김일성을 꼭두각시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결정하였다. 김일성은 이 사실을 黃長燁 선생한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李承晩은 그런 김일성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李 대통령은 연설 때 김일성을 무시하고 늘 스탈린을 겨냥하여 이야기하였다. 김일성을 스탈린의 人形으로 정확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 李承晩은 미국 대통령을 향하여 호통을 친 사람이다. 1954년 7월 李承晩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미국의 어중간한 對공산권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미국 행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7월30일 백악관에서 2차 頂上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묵고 있던 李 대통령에게 미 국무성 副의전장이 頂上회담 후 발표할 공동성명서 초안을 들고 왔다. 이 초안에는 李 대통령이 싫어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날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워?" 백악관서 정상회담 보이콧 소동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 운운'하는 대목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國交를 수립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군 작전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여기에 李承晩 대통령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싫었고, 한국의 國力이 약한 입장이므로 일본과 수교하는 데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李 대통령은 즉각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백두진, 양유찬, 김정렬씨 등이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1954년 방미한 이승만 대통령 부처가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내외와 백악관서 기념촬영. ⓒ 뉴데일리 하워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제2차 韓美 정상회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인데 李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하셔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여 李 대통령은 10분쯤 늦게 백악관내 회담장에 도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韓日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적 막말'을 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일본 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젠하워(愛稱이 아이크) 대통령도 화를 벌컥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李 대통령은 이때 아이크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물론 이 말은 통역되지 않았다. 아이크는 가까스로 화를 식히고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李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 기자 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갑니다" 李 대통령에 이어 아이크도 나가버렸다. 양유찬 駐美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계속했다. 그래도 미국은 군사원조 4억2000만 달러, 경제원조 2억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對韓원조를 약속했다(한표욱 지음, '이승만과 韓美외교' 참고. 중앙일보사 발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선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독특한 웃음이 그의 매력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와 큰 차로 당선되었다. 이때 선거구호는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였다. 아이크는 당선자 시절 한국전선을 방문했다. 그는 6.25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했었다. 이때부터 李承晩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1875년생인 이승만은 頂上회담 당시 79세로서 아이크보다 15세가 더 많았다.
인간 크기의 차이=국력과 국격의 차이
李承晩과 김일성의 인간 크기의 차이, 그 차이만큼 지금 남북한의 國力과 國格이 벌어져 있다. 1958년 9월 宋仁相 부흥부장관은 金泰東 조정국장과 재무부의 李漢彬 예산국장을 데리고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의 對韓원조를 많이 얻어내고 이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경무대로 李承晩 대통령을 예방했다. 李 대통령은 "송 장관이 간다니 잘 해가지고 올 것으로 알아. 그러나 한 마디 꼭 해두고싶은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 "원래 우리 한국인은 남에게 돈 달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그러지 않나.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억울한 이야기를 미국의 朝野에 널리 알리게. 38선 얘기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제 나라에서 치러야 했을 전쟁을 우리 땅에서 했으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지 않나. 원조를 좀더 많이 달라고 해봐. 그리고 '조그만 일에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게.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잘게 굴면 위신이 서지 않아. 하물며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위신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네. 정정당당히 조리 있게 이야기해봐. 큰 성공이 있기를 바라네." 李대통령은 외교하는 데 보태 쓰라고 흰 봉투를 하나 주었다. 미화 1000 달러가 들어 있었다. 100 달러 사용도 주저하는 李대통령으로서는 큰 돈이었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태평양을 날아가는 노스웨스트 항공기 속에서 宋장관 일행 세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 잠도 못 잤다고 한다(宋仁相 회고록 '復興과 成長').
"국제정세와 민주주의에 최고의 안목을 가진 사람"
6.25 동란기에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는 퇴임후 역사기록을 위한 증언을 하는 가운데 李承晩 대통령을 "국제정세에 관해서 최고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격찬했다. 무초는 또 李 대통령이 제퍼슨 민주주의자(Jeffersonian democrats)임을 자처했다고 말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고, 3代 대통령을 지냈으며 루이지애나 매입(2300만 달러를 주고 프랑스로부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지역을 사들임)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넓혔다. 미국 독립정신의 핵심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을 Jeffersonian democrats라고 부른다. 우리의 建國 대통령이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인물이었다면 그 흔적이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약점과 대중의 우매함을 잘 안 사람이었다. 그는 性善說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의 분별력이 약하여 민주주의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제퍼슨은 그런 국민들로부터 主權을 회수하여 독재정치를 펼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을 교육할 것인가 自問했다. 결론은 後者였다.
제퍼슨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정부와 代義 민주주의 존중: 미국 헌법 조문의 엄격한 해석으로 정부의 권력남용을 막는다. 2.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의무이다. 3. 국민의 알 권리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존중한다. 4. 정부는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교육을 중시한다. 6. 미국이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7.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의 자유 보호책이다. 종교는 정치부패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정치는 종교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6.25 전쟁중에도 대통령--지방자치 선거까지 모두 치르다
李承晩 대통령이 新生 대한민국에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구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엔 제퍼슨식 민주주의와 유사한 면이 많다.
1. 政敎분리: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 신도였으나 정치에 기독교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나 기독교 국가를 만들거나 기독교를 우대하진 않았다.
2. 교육重視: 李 대통령은 언론과 학교를 통하여 한국인을 깨우치면 一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 私有재산권의 신성시: 李 대통령은 농지개혁 때도 地主들에게 보상을 하도록 했고, 화폐개혁 때도 일정 액수 이상의 예금동결 계획에 반대했다.
4. 代義민주주의 존중: 李 대통령은 국회와 많이 갈등했으나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戰時에도 국회는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려 했다. 戰時에도 대통령 선거는 이뤄졌고, 특히 시, 읍, 면의회,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선거 투표율은 90%나 되었다. 이때 선거로 뽑힌 의원들은 1만 명을 넘었다. 5. 언론자유의 존중: 李 대통령은 정부 비판을 많이 하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으나 조직적인 탄압을 거의 하지 않았다. 戰時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다.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李承晩은 미국과 미국인을 대함에 있어서 열등감이나 대책 없는 반항심을 일체 보이지 않고 당당하되 늘 감사했다.
나이 스물아홉 살에 쓴 ‘독립정신’에서 그는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동시에 <외국인의 횡포에 대해선 생명을 바쳐서라도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괴로움을 피하여 몇 만 리 떨어진 남의 나라로 가서 그 나라 국민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면 어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는 배재학당을 다닐 무렵 徐載弼이 “미국에선 좋은 강연을 들으면 이렇게 박수를 친다”고 가르쳐주었을 때 “뭐, 조선인이 박수까지 따라할 필요가 있나”라고 거부감을 느꼈다고 傳記를 쓴 徐廷柱 시인에게 털어놓았다.
"남의 아버지이름에 경칭 생략?" 서정주의 '이승만전기' 판매금지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등 미국의 名門 대학만 나오고 30대 초반에 이미 미국의 두 대통령(우드로 윌슨, 시어도어 루스벨트)을 만나고 親交했던 그였지만 徐廷柱에겐 ‘가장 변하지 않은 조선인’이 李承晩이었다. 李承晩은 취재차 매주 찾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더라만/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내 가슴 속이 문득 복받쳐 오르며, 저조갑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