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은 韓日합병 100주년, 6.25남침전쟁 60주년, 4.19義擧 50주년, 광주사태 30주년, 그리고 李秉喆 삼성그룹 설립자의 탄생 100주년이다. 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이고 삼성을 세계一流 기업으로 만든 李秉喆은 LG 그룹의 창립자 具仁會, 효성그룹의 창립자 趙洪濟와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고 서로 인척관계이다. 26년 전 세 사람의 고향을 찾아가서 썼던 글을 소개한다.
具仁會 李秉喆 趙洪濟의 고향
-세 사람은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다.
<1984년 3월 월간조선>
이병철, 구인회는 지수(智水)국민학교 동기 동창
럭키그룹 창업자 故 구인회씨는 1907년,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 승산(勝山)마을에서 났다. 삼성 그룹 총수 이병철씨는 그 3년 뒤 이웃 의령군 정곡면 중교(中橋)부락에서 났다. 중교는 승산마을(공식 지명은 勝內里)에서 남강(南江)을 건너면 당시에도 하루 길밖에 안 되는 가까운 동네였다. 1984년 1월에 작고한 효성 그룹 창업자 조홍제씨는 구인회씨보다 1년 먼저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新昌)마을에서 태어났다. 승산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부락이다.
합치면 年매출이 약 15조 원이나 되고 부가가치 생산에선 대한민국 GNP의 약 5%를 담당하는 세 재벌의 창업자들. 그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거의 같은 인생의 궤적을 그렸다.
구인회씨와 이병철씨는 한 때 지수국민학교의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구인회씨는 또 이웃 마을 조홍제씨와는 어린 시절 친구였고, 중앙고보(中央高普) 동문 사이이기도 했다. 이병철씨와 구인회씨는 사돈 사이였다. 구인회씨의 3남 구자학(具滋學)씨는 이병철씨의 둘째 딸 이숙희(李淑姬)씨와 결혼했다. 이병철 가문과 조홍제 가문도 그 웃대에서 자주 통혼했다.
오늘의 삼성그룹은 조홍제씨와 이병철씨의 동업으로 시작되었고, 구인회씨와 이병철씨도 한때 라디오 서울과 동양TV를 공동 경영했었다. 두 동업관계는 다같이 유감을 남긴 채 끝장났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같은 인생 무대에서 소년기엔 소꿉친구, 성년기엔 동업자나 경쟁자, 혹은 사돈 사이로 치부의 길을 매진햇던 세 부자(富者). 도대체 어떤 조화의 끈이 이웃 동네 세 소년을 당대의 억만장자로 키웠고 그토록 가깝게- 지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그들을 엮어 놓았을까? 그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세 부자의 뿌리를 찾아 나선 나는 그런 호기심부터 느꼈다.
화목과 검소의 具氏 가문
남들이 보는 데선 짚신을 신고 다니다가도 남이 안 보는 데선 짚신을 들고 다녔다. 담배에 담배를 재고 빨기는 하지만 후욱 뱉는 건 입김일 뿐, 담배엔 불이 붙어있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부채를 펴고는 있지만 사실은 얼굴을 흔들고 있을 뿐, 부채를 닳게 하지 않으려고 들고만 있었다. 머슴들이 한창 일을 하는 데 와선 담배대에 담배를 재 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머슴들은 주인이 언제 담배를 피우러 올지 몰라 긴장상태에서 열심히 일한다.
조상들의 이런 구두쇠 전설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구인회씨의 고향 사람들이다.
진주(晉州)에서 남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마산쪽으로 10여 분 달리면 반성(班城) 못 미쳐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느릿한 고개를 넘어서면 오른쪽 저 멀리 우뚝한 방어산(防禦山) 줄기 왼쪽으론 가깝게 나지막한 언덕이 옆으로 길죽하게 둑처럼 누워 있다. 그 언덕 밑에 옴팡하게 자리잡은 승산마을.
벌써 바깥 모양새부터가 범상치 않다. 여느 농촌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큼직큼직한 수십 채의 기와 고옥(古屋)들이 이 작은 마을을 무겁게 꽉 채우고 있다.
『남대문 바깥에선 이런 부촌이 없다고 그랬죠. 「주백리(周百里)가 승산 토지 」란 말 그대로 함안. 사천. 의령군에까지 우리 농토가 퍼져 있습니다. 만석꾼이 셋, 천석꾼이 일곱, 그래서 승산 부자 열 명이 3만7천 석을 한다고 했지요. 그런 부자마을인데도 「청어 장사를 울려 보내는 승산」으로 소문날 만큼 셈에 밝고 검소한 분들 이었답니다 』
마을 유지 허병현(55)씨의 말이다. 승산 마을의 주류는 능성 구씨(綾城 具氏)가 아니라 김해 허씨(金海 許氏)였다. 이 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 온 사람은 지금 허씨 종손의 17대 조상, 때는 조선 세종시대였다. 구씨가 이 마을에 끼여든 것은 한참 뒤로서 구인회의 8대조인 구반(具槃)이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구씨들은 곧 선주(先住)집단인 허씨 집안과 통혼(通婚)을 시작, 두 가문은 핏줄로써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머리 수에선 김해 허씨들이 훨씬 위다.
지금 승산 마을의 성씨 분포를 보면 허씨가 1백12호, 구씨가 36호, 타성이 1백48호다. 옛날엔 타성들이 거의 없었고 허, 구씨의 비율은 지금과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승산에서 서울 및 부산으로 옮겨가 살고 있는 허, 구씨들은 약 3백40호. 대부분은 럭키 그룹과 연고를 갖고 잇다. 구인회라는 거대한 자석에 의해 빨려나간 사람들의 자리를 메우며 들어 온 것이 타성들이었다.
김용완(金容完), 이병철(李秉喆), 홍재선(洪在善) 제씨가 具씨 家의 사돈들
오늘의 럭키 그룹을 쌓아 올린 힘은 許, 具 두 집안의 화목과 협동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평해지고 있다. 구인회씨의 생가는 우람한 고가(古家)로 지금은 마치 박물관처럼 보존되고 있다. 대지 6백여 평, 문간방. 사랑채. 창고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바로 옆집은 인회씨의 처가집이다. 소년 구인회가 미래의 아내 허을수(許乙壽) 소녀를 자주 넘겨다 보았을 흙담장도 두 가문의 친목을 상징하듯 야트막하면서도 아담하다.
남편을 14년 전 먼저 보낸 허씨는 지금 76세의 할머니. 럭키 그룹의 산실(産室)인 부산 연지동에서 살고 있다. 가끔 이 곳 생가를 찾는다고 한다. 구인회씨의 장남 자경씨(滋暻) 태회씨(泰會. 전 국회부의장) 등도 한 해에 몇번은 생가를 순례한다고 한다.
구인회씨의 사업에 허씨들이 동참하게 된 계기는 해방 직후 허준구(許準九)씨(럭키그룹 부회장 겸 금성전선 회장)가 인회씨 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준구씨는 인회씨의 바로 아래 동생 철회(哲會)씨(작고)의 사위였다. 그의 아버지 허만정(許萬正)씨는 인회씨의 장인 허정식(許萬寔)씨와 재종간이었다. 만정, 만식씨는 당시 승산 마을의 2대 갑부이기도 했다. 인회씨와 준구씨를 축으로 하여 두 집안의 형제들은 한 덩어리가 됐다.
사람 복이 많은 인회씨는 여섯 형제 중 맏이었다. 아래로는 6남 4녀를 거느렸다. 준구씨는 여덟 형제 중 셋째였다. 구인회씨의 둘째 동생 철회(작고), 셋째 정회(貞會 : 작고), 네째 태회(泰會 : 럭키그룹 상임고문), 다섯째 평회(平會 : 호남정유 사장), 여섯째 두회(斗會 : 미주지역 통괄사장)씨, 허준구씨의 바로 위의 형 학구(鶴九 : 前 반도상사 부사장), 바로 밑 동생 신구(愼九 : 금성사 사장), 그 아래 완구(完九 : 대왕육운 회장), 인회씨의 큰 아들 자경(滋暻 : 럭키그룹 회장), 셋째 자학(滋學 : 주식회사 럭키 사장), 네째 자두(滋斗 : 금성반도체 사장), 철회씨의 큰 아들 자원(滋元 : 신영전기 사장)씨 등 일족은 모두 럭키 그룹 계열 회사의 최고 경영층을 장악해 왔다.
구인회씨가 사람 복을 타고났다는 것은 혈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녀들의 혼사를 통해서 또는 친구들과의 교분을 통해서 실로 화려한 인맥을 구축했다. 이 인맥은 럭키그룹의 성장에 강력한 엔진 구실을 했다.
인회씨가 이병철씨와 사돈이 된 것은 앞서 적은 대로고 둘째 아들 자승(滋升)씨는 금성방직 사장을 역임했던 전경련 전 회장 홍재선씨의 딸과 짝지어졌다. 넷째 자두씨는 국방차관을 지냈던 이흥배(李興培)씨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둘째딸은 대림산업 창설자 이규덕(李奎德)씨의 며느리, 셋째딸은 제일은행장을 지낸 이보형(李寶衡)씨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막내딸은 유지민(柳志敏)검사(당시)와 결혼했다.
장남 자경씨의 큰딸 선미(宣美)씨는 전경련 명예회장 김용완씨의 동생 용관(容琯)씨의 며느리가 되었다.
럭키 그룹의 비약적 발전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던 이는 서정귀(徐廷貴)씨였다.
서씨와의 인연은 인회씨가 1968년 그를 부산의 국제신보 사장으로 초빙하면서부터 맺어졌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는 대구사범 동기생이며 일제시대 만주에서부터 친숙했고 공화당 시절 경제계의 代父 노릇을 했던 서씨는 럭키 그룹이 호남정유를 차지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공화당의 거물 태회씨와 함께 서씨는 정치의 영역에서 인회씨 가족 경영 집단의 견인차가 됐던 것이다.
재벌의 조건은 토지 더하기 교육
인회씨는 1931년 25세의 나이에 진주에서 구인회상점(具仁會商店)이란 포목상을 차렸다. 밑천 2천 환은 5백 석 부농이었던 아버지가 대주었다. 부촌에서 대대로 축적된 농업 자본이 최초로 상업자본으로 전환한 셈이었다. 이 상업 자본은 해방 직후 부산에서 <동동 크림>을 생산하는 락희화학(樂喜化學)의 설립으로 이어져 근대 산업 자본으로 다시 변모하게 된다. 인회씨의 치부를 가능케 했던 것은 토지라는 하드웨어와 교육이라는 소프트웨어였다.
승산 마을 언저리에 있는 지수국민학교의 지금 재학생 수는 3백 명 남짓하지만 65년 전에 세워진 이 작은 학교는 재벌들의 산실이다. 구인회, 구태회, 구자경, 이병철, 허정구, 허신구 등등 삼성, 럭키 그룹의 수뇌진을 배출한 학교다. 소년 이병철은 남강 건너 의령 땅에 집이 있었지만 승산 허씨 가문의 허순구씨(작고. 풍국주정 사장)에게 시집 온 누님을 따라 승산에서 살면서 인회 소년과 함께 지수국민학교에 다녔다. 병철 소년은 나중에 중퇴했다.
허씨 집안 중에서 유일하게 이병철씨와 함께 일한 사람은 허준구씨의 맏형 정구(鼎九)씨다. 그는 제일제당 전무, 삼성물산 사장을 거쳐 삼양통상을 창설, 독립했다. 인회, 병철씨 등은 모두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국민학교에 편입했다. 인회씨는 결혼 다음 해 15세 때 2학년에 들어갔다. 승산 마을에서 구씨들은 각기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양정재(養正齋), 연정(蓮亭)이란 이름의 옛서당 건물 두채는 지금도 단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인회씨 집에선 지수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를 서울로 보내 中央고보에 입학케 했다.(병철씨는 中東고보).
승산 부자들이 이처럼 기민하게 전통의 껍질을 깨고 나와 신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타산에 밝은 그들의 실용적 가풍 덕분이었으리라. 두 농촌 부자집 소년이 새 문물에 접하여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그들이 입신(立身)의 길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동족상잔도 극복한 인화(人和)
근대 한국 농촌의 인간관계를 시험한 사건은 해방 직후의 좌우익 충돌과 한국 전쟁이었다. 승산 마을 사람들은 이 시련기를 어떻게 견뎌냈던가? 허병경씨는 말한다.
『부산 교두보의 맨 끝이라 전투는 치열했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고자질하거나 죽이는 참사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저는 그것이 유행 감기처럼 후딱 지나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을 사람 하나가 좌익에 가담했다가 딴 곳에서 잡혀왔을 때도 우리는 용감하게 구명 진정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경찰서장이 나를 불러 호통을 쳤을 때 저는 말했습니다. 「물은 흘러가지만 자갈은 남는다. 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법이 할 일이고 목숨을 애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일이 아닌가? 」결국 그는 사형을 받았습니다만....』
인화를 특징으로 하는 럭키 그룹의 분위기는 승산 마을의 이런 인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인회씨 등 구씨 일족들이 돈을 많이 벌었지만 사람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별로 듣지 않고 비교적 소탈하며 여자관계의 스캔들이 없는 것도 이 마을의 질박한 전통에 영향받은 바 아닐까?
그러나 승산 마을은 이미 박제, 공동화(空洞化)돼 가고 있다.
"젊고 잘난 사람은 다 떠나고 못난 늙은이들만 남았다"는 푸념이나
"명절 때 아이들이 돌아오면 비로소 사람 사는 마을 같고 떠나면 또 절간이다"는 하소연이 승산의 현주소를 암시하는 듯 하다.
이 마을에 있는 지수면 사무소에서 면장 이윤환씨는 『우리 면에는 럭키, 삼성, 효성 그룹 연고자들이 많아 이농현상이 심하다』고 했다. 지난 68년엔 6천5백 명이던 인구가 83년엔 3천9백 명으로 줄었다. 한때 <주백리(周百里) 농토>를 자랑했던 승산의 가구당 평균 농지 면적은 0.73ha로 면 전체에서 가장 떨어진다. 승산의 허, 구씨들은 거의가 외지로 나간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있는 듯 했고, 이 마을이 더 이상 <빈 동네>가 되지 않도록 럭키 그룹이 근처에 작은 공장이라도 하나 세워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1984년 설날엔 수십 대의 버스와 자가용 승용차가 이농하여 출세한 도회지 친척들을 태우고 와 이 마을에 부렸다. 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금의환향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지수면의 상주 인구가운데 60%가 60세 이상 노인과 10세 이하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속이 빠진 부자촌의 껍데기, 그 古家들을 민속자료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남강변의 상류사회 이룬 세 家門
효성그룹 조홍제(趙洪濟)씨가 타계했을 때 한 때의 동업자 이병철씨가 문상을 했다 해서 얘기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이씨보다는 네 살, 인회씨 보다는 한 살 위인 조씨는 어릴 때엔 인회씨와 더 가깝게 놀았다. 마을 대항 축구 경기를 자주 벌였던 것이 趙, 具 두 소년이었다. 具, 李, 趙 세 소년의 집안은 모두 부자였고 선대 사람들이 선비 행세를 하며 향교를 같이 출입하는 등 교류가 빈번하여 대대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세 문중은 통혼도 서로 자주 하여 남강변 일대에선 확고한 <상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세 소년은 지연(地緣), 혈연(血緣), 그리고 학연(學緣), 부연(富緣)으로 얽히고 설킨 공통된 문화적 토양에서 자랐다. 세 그루의 거목이 이룩한 엄청난 부(富)의 과실(果實)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이런 토양에서 맺어진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조홍제씨의 고향은 승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분(차편)의 거리다. 함안조씨(咸安趙氏)의 터전인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新昌)마을. 이 마을 한가운데를 가르며 포장된 신작로가 고속도로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한겨울 날의 해거름, 이 신작로엔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길 양쪽으로 붙어있는 집들은 분명히 농가들이지만 나는 서울 변두리에서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조씨의 생가를 찾아 샛골목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흙담과 돌뿌리 채이는 길과 만났다. 농촌다운 포근한 안도감. 그제야 나는 조용한 농촌을 꿰뚫고 있는 황량한 신작로가 이 마을의 아담한 취락과 심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신작로는 대화가 있는 <길>이 아니라 교통만 있는 <도로>였다.
신창마을에는 조홍제씨의 가까운 친척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백12 가구 가운데 함안조씨는 16호에 불과하다. 조홍제씨가 태어나 자란 집을 지키고 있는 5촌 당숙 조두제(趙斗濟)씨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조홍제씨의 집안은 이웃 중암(中岩)마을에서 12대를 살다가 이 마을로 옮겨와 3대를 살았다. 물론 그의 아버지도 수천 석 농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조홍제는 한때 이병철과 동업
조씨는 친구인 具, 李씨에 비해 <늦된> 사람이었다. 서당을 다닌 뒤 군북국민학교를 거쳐 중앙고보에 들어갔다. 3학년때 6.10만세사건에 연루돼 서대문 형무소 신세를 진 뒤 퇴학 맞고 일본으로 갔다. 여기서 법정대학(法政大學)을 졸업하니 나이 30세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농사도 짓다가 해방을 맞았다. 당시 그는 1천 마지기의 농토를 갖고 있었는데 농지 개혁 때 이를 몽땅 처분, 4백80만 환을 만들어 서울로 올라왔다. 여기서 이병철씨를 만났다.
고향에서 조씨는 병철씨보다는 동갑나기인 그의 형 병각(秉珏)씨와 더 가깝게 지내며 한때 사업도 같이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조씨는 병철씨와 함께 무역회사를 세울 것을 의논했다. 조씨가 1천만 환, 이씨가 7백만 환을 조달,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그후 15년간 동업하다가 1962년 조씨는 이씨와 헤어졌다. 그 때가 56세. 오늘의 효성 그룹은 그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 터를 닦은 셈이다.
대지주에서 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과정은 李, 具씨와 같았지만 인간적인 면모에서는 달랐다. 구인회씨는 소탈, 병철씨는 냉철하다면 조씨는 중후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부자 조홍제씨의 고향 신창부락은 매우 가난하다. 동장 홍상효(47)씨를 만났더니 마침 그는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의료보호 카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카드 뭉치가 두툼하다. 홍씨에 따르면 이 마을의 가구 당 농토면적은 전국 평균의 약 60%에 불과한 0.6ha이라고 했다. 연간 평균 소득은 가구당 2백만 원. 2백12가구 가운데 70호가 <농토 없는 농민>이고, 그 가운데 약 50가구가 영세민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농토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넘치고 있습니다. 최근엔 도시 영세민까지 이 곳으로 돌아오고 있어 노동력의 과잉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겨울철 농한기 넉달 동안 이들 영세민은 날품팔이 할 곳도 없습니다. 면내에 국제실업이라는 건설업체가 하나 있어 20여 명이 취업하고 있었는데 이나마 지난해 12월에 도산해 버렸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굶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라면이나 죽우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은 더러 있습니다 』
마을 한복판을 관통하는 넓은 도로의 포장공사도 이들 영세민을 돕기 위한 취로사업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홍동장은 말했다.
일손 남아 골치 아픈 마을
<일손 모자라는 농촌>이 아니라 <일손 남아 골치아픈> 신창마을에선 얼마 전 강도사건까지 일어났다. 복면 청년이 밤중에 칼을 들고 집에 들어와 여주인을 찌르고 돈을 빼앗아 갔다가 붙들렸는데 잡고 보니 마을회관 관리자의 아들이었다. 같은 마을 사람이 강도짓을 했다는 것보다도, 털어갈 돈이 6천원 뿐이었고 범인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수많은 마을 청소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가난한 신창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이금조씨(47) 집을 밤중에 찾아갔다. 떨어져 나가는 대문짝, 무너질 것 같은 지붕, 어지러운 마당,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얼굴들... 주인 이씨는 좌절한 이농자였고 지금은 여섯 가족의 가장이지만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무력자(無力者)였다.
고아로 자란 이씨는 부인 심말련씨(40)와 결혼한 직후인 27세 때 신창마을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날품팔이 생활을 약 9년간 한 끝에 기적처럼 취직한 곳이 3부두 앞에 있는 대한통운 컨테이너 하역장. 첫 월급도 받기 전에 그는 여기서 추락사고를 당했다. 부러진 등뼈, 1년 2개월 동안의 입원생활, 그러나 하반신 마비는 운명처럼 그를 정복해 버렸다. 1백만 원의 보상금을 손에 쥐고 귀향, 폐가 같은 지금의 집을 한 채 장만하고 그는 방안에 틀어 박혔다.
몇 번 자살도 생각했으나 착한 아내와 무럭무럭 커 가는 두 아들, 두 딸을 보면서 그는 견디고 있다. 마산까지 고등학교 통학을 하는 큰아들(2학년)이 가끔 아버지를 리어카에 싣고 마을로 나들이를 나간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외출수단이다.
아내 심씨가 사실상의 가장이다. 장터에 있는 블로크 공장에 나가 5년째 노동을 하고 있다. 하루 수입이 3천 5백원. 그나마 겨울엔 문을 닫는 공장이고 가동해도 한 달에 보름 밖에 일을 하지 못한다. 월 5만원 남짓한 수입원 이외에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식량을 지원받았으나 큰아들이 19세가 되는 올해부터는 생활보호대상에서도 제외돼 생계가 막연하다.
신창마을의 두 사람. 조홍제씨와 이금조씨는 우리 농촌의 빛과 그림자이다. 두 사람은 같은 이농자들이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趙,具,李씨 등이 부자가 될 수 있엇던 공통 요인이 <부자가 부자를 낳고 토지가 재벌을 낳는다>는 법칙이었다면 이금조씨에게 적용된 법칙은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왜 돌아가셨는지는 압니다. 일제시대 징용되어 만주에서 고생을 하시다가 고향에 돌아 오셨는데 온 몸이 동상에 걸려 있었습니다. 몸이 썩어 들어갔고 그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손가락이 썩어 문들어지면서 점점 짧아지더니 나중에는 몽땅하게 되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집을 나가시고 그 뒤로 저는 고아가 돼버렷습니다』
유폐생활을 하는 김금조씨의 오직 하나 즐거움인 흑백 TV는 그날 고장나 있었다. 신창마을의 TV 보급률은 약 90%, 신문 보급률은 약 10%, 겨울철의 하루 평균 TV 시청시간은 6시간 쯤 될 것이라고 동장 홍씨는 말했다. 전파 매체의 영향권에서 첨단 문물에 접하고 있는 이들이지만 영어로 된 농약 이름 때문에 혼돈을 일으켜 살충제를 써야 할 논에 제초제를 뿌려 벼를 말라 죽이기도 한다.
신창 마을 사람들은 조홍제씨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많은 자녀들이 효성그룹 기업에 취직해 나갔고 장학 혜택을 받기도 했으며 마을의 공공 시설물 건립에 조씨는 돈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억만장자도 고향 마을의 가난을 어쩔 수 없었다는 점에서 농촌문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겠다.
4백년 집념이 결실되다.
의령군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독립투사 안희제(安熙濟)의 고향이자 우범곤(禹範坤)이란 순경이 펼친 지옥도(地獄圖)의 무대이다. 지금은 두 위인의 발자취보다는 한 악인의 그것이 더욱 뚜렷하다. 의령읍에서 정곡면으로 가는 길은 禹순경의 난동현장 궁류면(宮柳面)으로도 이어진다. 의령읍 ~ 정곡면 ~ 궁류면 사이 약 15km 비포장도로는 우순경 사건 직후 포장공사가 시작되어 지난 해 깨끗이 마무리되었다. 이 정도의 포장도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고 그래서 많은 주민들은 "그 놈의 덕이다"고 말하고 있었다.
의령읍에서 대구쪽 국도로 약 13km를 달리면 정곡면 중교리가 나타난다. 중다리로 통칭되는 중교리엔 세 마을이 있는데 이병철씨가 난 곳은 장내(墻內)마을이다. 옛날 은진 송씨(恩津 宋氏)들이 이 마을에 처음 정착했을 때 담장(墻)을 쳐놓고 안에서 오손도손 살았다 하여 그런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송씨들은 그 뒤 어디론가 이주해 나가고 병철씨의 집안인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들어 왔다. 입향조(立鄕祖)는 관직을 잃은 선비 이계번(李桂蕃). 그는 처음부터 부를 낳을 수 있는 풍수지리의 요처(要處)를 찾아 헤맸다고 한다. 관계에서 실패한 때문인지 그는 벼슬보다는 금력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처음엔 경주에서 지금의 의령읍 부근에 옮겨 와 살았으나 그곳은 아전들이 득세할 곳이라고 짐작, 지금의 중교리로 다시 옮겼다. 당시엔 중교라 불리지 않고 은교(銀橋)라고 했다. 이 銀자에 이끌려 그는 이 마을에 가문의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병철씨는 말하자면 4백여 년에 걸친 우리 가문의 소원을 이룬 셈이죠』
병철씨의 동생뻘 되는 정곡면 전 면장 이상식(李相式.60)씨는 말했다. 장내마을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남강을 바라보며 양쪽으로 갈라져 발달한 취락이다. 1백50여 가구, 5백93 명이 살고 있다. 경주 이씨는 36가구를 차지한다.
승산, 신창마을과 꼭 같이 대다수의 이씨들은 삼성이란 흡인력에 끌려 대구 부산 서울 등지로 나가 살고 있다. 그러나 구인회씨 집안과는 달리 이곳 이씨 문중 사람으로 지금 삼성그룹 경영진에 끼여 있는 이는 한명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고 있는 이병철씨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주인 기다리는 이병철 별장
具, 趙씨에 비해선 병철씨와 이곳 고향마을의 관계는 그렇게 밀접하지는 않는 듯했다. 면사무소의 어느 직원은 『향토 발전에 이병철씨가 좀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병철씨가 이 마을에 다녀간 것도 12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이 마을에 병철씨가 난 집과 그가 자란 집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
난 집은 장남 병각(秉珏)씨(작고)의 아들인 제일병원 원장 동희(東熙)씨 소유다. 병철씨 생가는 낮은 언덕을 지고 남향한 대지 7백여 평의 기와집이다. 이 마을에선 지금도 가장 큰 집이다. 5백 석 부농이었던 그의 아버지 덕분에 이병철씨는 『먹고 살려고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니라 재미 삼아 시작한 것이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근처에서 <이병철씨 별장>으로 알려져 있는 큰 기와집은 그가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6.25때 불탄 것을 12년 전 새로 지었다. 일곱 칸 기와집은 비어 있었다. 12년 전 병철씨가 하룻 밤 묵고 간 뒤 줄곧 주인을 맞지 못하고 있다. 이 별장 정원엔 향나무 은행나무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고 그 한 구석에는 관리인 성창섭(53)씨가 살고 있다. 그는 병철씨 둘째 아들 창희(昌熙)씨와 정곡국민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큰 아들 맹희(孟熙)씨(55)가 대구 고모집에서 공부할 때 성씨의 아내는 그 집의 가정부로 일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연고로 성씨는 병철씨 별장 관리인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청소년기의 병철씨를 기억하고 있는 이곳 노인들은 모두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렵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긴장감을 준다는 뜻이다.
<싫은 소리는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사람>
<수더분한 형 병각(秉珏)씨와는 대조적으로 잡기를 모르고 깔끔한 사람>
<음식을 매우 가리는 사람> 등등이 그들의 뇌리에 아직까지 박혀 있는 이병철 상(像)이다.
길은 들어오고 돈은 빠져나가
이병철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도 중퇴하여 지수국민학교, 중동고보 중퇴 이력과 함께 한 장의 학교 졸업장도 받은 적이 없는 묘한 학력을 남겼으니 사업에선 결코 중퇴하지 않았다.
1938년에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기 전, 그는 재종질(再從姪) 이만희(李萬熙)씨와 함께 마산에서 미곡상을 크게 경영한 적도 있다. 구인회씨나 조홍제씨처럼 이병철씨도 농업자본을 딛고 <장사꾼>으로 탈바꿈했었다.
이상식(李相式)씨는 『이 마을이 병철씨가 난 곳이라고 소문이 나놓으니까 못사는 사람들이 먹고 살 것이 있는 줄 알고 들어오는 일이 가끔 있다』고 말했다. 장내마을도 벌써 전에 그 옛날 부촌의 영광을 벗어 던졌다. 농지는 가구당 1ha로 전국 평균치와 비슷하지만 주민의 약 20%가 영세민이다. 농촌 영세민의 분류 기준은 <농토가 3백 평 미만, 재산이 2백만 원 미만인 사람>으로 돼 있다.
이상식씨는 『이 마을은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 생산 기반이 너무나 약하다』고 말하면서 『최근엔 반갑지도 않은 다방이 세 군데나 생겼다』고 투덜댔다. 국도변에 있는 77다방에는 비디오 시설까지 되어 있었고 대낮부터 할 일 없는 농민들이 난로가에 모여 앉아 영화구경을 하면서 농업 정책을 욕하고 있었다.
『추곡 수매량이 줄어서 나는 30% 밖에 못 팔았다. 나머지는 한 푸대(55kg들이)에 5천원씩 손해보면서 미곡상들에게 팔았다.』
『쌀 팔아 길에 다 깔아 버린다』
『농사 지어 빚 갚기 바쁘다』
『농사 이외에 뭘 하려고 해도 너무나 자주 변해 무섭다. 한 달 전에 소 한 마리를 2백만 원에 샀는데 지금은 백만 원으로 뚝 떨어졌다 』
『쌀을 창고에 쌓아 두자니 분통이 터져 요새는 도시 친척들에게 한 가마씩 선물하고 있다』
이 마을엔 장터가 있다. 네댓 군데 점포가 있긴 한데 구멍가게보다도 진열상품이 적다. 우순경 덕택으로 국도가 포장된 뒤로는 시장은 더욱 피폐해졌다고 한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마을사람들이 가까운 의령읍이나 마산까지 나가서 물건을 사 오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유리해졌지만 우리 마을 돈이 자꾸 빠져나가는 결과를 빚고 있다』
고 어느 주민은 걱정했다.
<길은 들어오고 돈은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남루한 시장 점포, 초췌한 늙은이들 만 어슬렁거리는 마을, 먼지를 눈처럼 뽀얗게 뒤집어쓰고 더욱 찌들어 가는 듯한 집들, 입만 열면 한숨과 자조(自嘲) 뿐인 주민들. 이런 마을로 뚫린 깨끗한 포장도로는 마치 환자의 살에 꽃힌 주사침같이 느껴졌다. 이 주사침은 영양제를 넣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환자의 피를 뽑아가고 있는 듯 했다.
역수(逆水), 남강물의 축복
풍수지리 연구가들은 가끔 具, 李, 趙 세 부자들의 선조들이 묻힌 무덤을 답사하러 온다. 그 무덤의 자리잡음에서 <재벌 탄생>의 기적을 해명하는 열쇠를 찾으려 한다.
풍수의 풍자도 모르는 나는 장내마을 앞 남강 둑에 서서 그 기적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흐른다 해서 <逆水>로 저주받은 이 강물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들이 세 부자들 일 것이다. 그들의 입신을 가능케 했던 추진력은 비옥한 농토였고 그 농토는 남강 물줄기를 받아 마시며 윤택하였다.
세 지주의 아들들은 그러니 이 남강과 농토를 재빨리 등짐으로써 오늘의 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농(離農) 제 1세대였다. 그들의 자력에 끌려 많은 농민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빨려 나갔다. 그래서 옛 부자촌은 속이 둘러빠진 지금의 빈촌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이 어디 세 마을만의 일이겠는가?
함안군 백산(白山)마을이 마주 보이는 호미 나루터에서 74세의 사공 김쾌점씨가 노 젓는 나룻배에 올랐다. 백산으로 친정 나들이 간다는 젊은 아주머니가 젖먹이를 업고 뒤다라 오른다. 궁류면에 산다고 해서 우순경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친척들이 많이 죽었지예』라고 가느다랗게 말한다. 사공 김노인은 『간밤엔 얼음을 깨어 뱃길을 틔어놓으려고 세 번이나 깨어났다』면서 운동장 만한 유빙(流氷)이 떠내려오자 사색이 되어 나룻배를 빗겨 저어나갔다.
『그 나이가 되도록 사공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도시로 나간 아들들 살림을 보태 주기 위해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짓 해서 한 2백 석 벌지만 그 놈들이 다 빼내간다』고 투덜대는 金노인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고 노 젓는 손은 억세게 보였다. 이병철씨와 동갑인 金노인. 고향을 떠난 사람과 고향에 남은 사람의 차이만큼 두 사람이 가진 행복의 크기가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