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물가 상승에 제조·유통업계 '네 탓' 공방전문가 "제도 재정비..소비자 교육·홍보 필요"
  • 제품에 권장 소비자가격을 표시하지 않는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라면과 과자, 아이스크림, 의류 등으로 확대 시행된 지 내달 1일로 1년이 된다.

    이 제도는 소비자에게 제품을 판매하는 가격의 책정 권한을 각 유통업체에 자율적으로 맡김으로써 가격 인하 경쟁을 유도한다는 의도로 시행됐으나 지난 1년간 인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소비자 혼란만 키웠다는 평가가 많다.

    전문가들은 제도를 취지에 맞게 재정비하고 소비자 대상 교육·홍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격 변화 비슷, 제조-유통 서로 '네 탓'

    빙그레의 '바나나맛 우유'는 A대형마트에서 6월 말 현재 4개짜리 한 묶음에 3천600원으로 작년 6월보다 300원(9.1%) 올랐고, B편의점에서는 1개에 1천100원으로 100원(10%) 올랐다.

    롯데제과 '월드콘'은 C기업형슈퍼마켓에서는 1개에 1천50원에서 1천400원으로 33.3%, B편의점에서는 1천500원에서 1천800원으로 20% 각각 인상됐다.

    농심 '신라면'은 A대형마트와 C슈퍼에서 각각 5개짜리 한 묶음이 2천920원으로 1년 새 변동이 없었으며 오리온 '초코파이'는 B편의점에서 12개짜리 1상자에 3천200원, C슈퍼에서 2천590원으로 작년 그대로였다.

    품목별 판매량 1, 2위를 다투는 이들 제품 모두 지난 1년간 업태별로 가격 변화폭에 차이가 거의 없었던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제조사에서 판매가를 정할 수 없더라도 납품가 또는 출고가는 조절 가능하기 때문으로, 판매가가 오른 제품은 출고가가 오른 것들이다.

    제조업체는 원가 상승 등의 이유로 출고가를 올리고 유통업체는 출고가 인상을 이유로 판매가를 올리는 관행으로 양쪽 모두 오픈 프라이스 확대 시행 이후 바뀐 것은 없다.

    그러나 생활물가 상승이라는 결과물을 놓고는 서로 '네 탓'으로 돌리기에 바쁜 모습이다.

    제조업체는 출고가보다 더 큰 폭으로 판매가를 올리는 유통업체의 '눈덩이 효과'를 문제점으로 지목하고, 유통업체는 출고가뿐 아니라 판매가도 사실상 제조업체가 결정하는 게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제조업체는 납품가를 올리겠다고 통보하면서 실제로 희망하는 판매가도 제시한다"며 "물론 협상을 하면서 가격대를 조절하지만 납품가 인상 폭 안에서 결정된다. 대형마트가 전적으로 바잉파워(buying power)를 가진다는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한 제과업체 관계자는 "유통업체와의 관계와 판매량 감소 가능성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제품 출고가를 원하는 대로 올리는 것은 아니며 물가 상승에 대한 사회적 우려 때문에 원가 인상 요인이 있음에도 가격을 쉽게 올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오픈 프라이스가 뭐죠?"..혼란 가중

    실질적인 가격 인하 효과가 없었던 것에 더해 소비자가 이 제도의 취지를 거의 인지하지 못한 채 물건을 고를 때 혼란만 겪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25일 오후 성동구 성수동의 한 슈퍼마켓 아이스크림 판매대 앞에는 '50% 할인'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기업형슈퍼에서 1천400원, 편의점에서 1천800원, 인근 유원지 매점에서 2천원인 '월드콘'은 이 동네 슈퍼에서 1천원에 팔리고 있다.

    오픈 프라이스 시행으로 기준이 되는 소비자가격이 없어졌으므로 할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지만, 이 슈퍼 주인은 "예전에 팔던 가격의 절반이라는 뜻"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을 보러 나온 주부 조모(56) 씨도 "오픈 프라이스가 뭐냐"고 되물으면서 "포장에 가격이 안 쓰여 있으니 값을 제대로 치르고 사는 것인지 잘 몰라 불편하다"고 말했다.

    가전이나 가구처럼 가격이 비싸고 가끔 사게 되는 대형 제품과 달리 라면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등은 가격 차이가 10~100원대에 불과하고 필요할 때마다 일상적으로 구입하는 품목이다.

    그만큼 업체별 가격을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고르는 소비자 선택권이 발휘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다만, 오픈 프라이스가 대다수 유통 선진국에서 시행되는 보편적인 제도이므로 제도 자체를 없애거나 물건을 제대로 선택할 소비자의 책임만 강조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은 제도 재정비와 소비자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홍보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녹색소비자연대 조윤미 본부장은 "생필품에 가까운 가공식품은 제도 시행 전에 사전 장치가 충분히 마련돼야 했다"며 "가격 선택권을 유통업체에 넘겨주는 만큼 각 업체가 가격을 매기는 방식에 대한 정책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