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어물․식기 등 한때 서울 서남권 대표시장마트 공세에 대응 못해... 병원부지로 매각고령 상인들, 생계 터전 잃고 친구도 잃고
  • ▲ 대림시장 입구를 지키던 간판이 철거됐다. ⓒ 정상윤기자
    ▲ 대림시장 입구를 지키던 간판이 철거됐다. ⓒ 정상윤기자

     

    지난 23일 오후, 44년 역사를 뒤로하고 이달 말 폐업하는 서울 영등포 대림시장을 찾았다. 입구를 지키던 간판은 철거되고 앙상한 골조만 남아 적막만이 흐른다. 벌써 비어버린 가게와 비울 준비를 하는 가게만 있을 뿐이다.

    대림시장은 건어물과 야채, 각종 식기를 주로 취급하던 전통시장이었다. 전성기였던 1970∼80년대에 상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점포 수만 200개가 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인근 지역뿐 아니라 가리봉동에서 장을 보러 올 정도로, 서울 서남권의 대표 시장이었다.

    90년대들어 주변 환경이 급변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천막 아래 좌판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대림시장 주변에는 논밭 대신 왕복 8차선 도로와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다.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곳곳에 들어서 시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결국 경영난에 시달리던 대림시장 운영주가 부지 매각을 결심했다.

    대림시장 부지 5115㎡(약 1550평)는 지난 4월 경매를 통해 한림대 강남성심병원으로 넘어갔으며 병원 측은 이 땅에 병원 시설과 주차장 등을 지을 계획이다. 8월 말까지 비워달라고 상인들에게 통보한 상태다. 1968년 문을 연 대림시장이 4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시장 상인들은 이달 30일까지 이주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러면 31일께 가게 보증금액에 따라 250만원에서 최고 500만원까지 이주비용을 받을 수 있다.

     “이주 보상금을 받는 것도 수십차례 협상을 통해 이뤄진 일인데 그나마 다행이라 여긴다.”
     -김윤희 대림시장 상인회장

    상인들은 이미 지난 5월부터 하나 둘 시장을 떠났고,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이들만 남았다. 수십 년간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상인들은 평생을 지켜온 일터와 한 가족처럼 지내던 동료를 잃게 될 생각에 한숨만 쉬고 있었다.

    35년째 분식노점을 하고 있는 민예순 할머니는 가슴이 답답하다. 그동안 라면(2,000원)과 빈대떡(1,000원), 막걸리 등을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 최근에는 아들이 사고로 머리를 다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아들을 생각하면 장사를 조금이라도 더 해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3평 남짓한 공간에서 40년째 옷가게를 하고 있는 이종남 할머니도 걱정이 많다. 남편 없이 홀로 3남매를 키운 것은 대림시장 덕이다. 할머니는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가게 안쪽에 있는 나무 금고를 가리켰다. 장사를 시작하며 들여놓은 것이다. 할머니의 40년 애장품이며, 지난 40년 역사이기도 하다.

    금고 안에는 때 묻은 줄자와 몇 년 전의 영수증만 들어 있었다. 이종남 할머니는 “대림시장은 내 고향이고 내 집인데. 난 여기 떠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았거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걱정이야”라며 눈물을 훔쳤다.

  • ▲ 대림시장 입구를 지키던 간판이 철거됐다. ⓒ 정상윤기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게를 얻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상인들은 “갈 곳이 없다”고 한다. 현재 이곳의 자릿세는 노점이 보증금 없이 하루 3,000~5,000원. 건물 내 점포의 임대료도 보증금 150만~300만원에, 월 20만원 선으로 인근의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싸다.

    “이 근처에 분식집이라도 차리고 싶은데 요즘 여기처럼 월세 20만~30만원으로 구할 수 있는 가게가 있겠느냐.”
     -김밥집을 운영하는 이순애 씨

    “도둑도 몇 번 맞고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이번처럼 황당하고 서러운 경우는 처음이다. 이사비라도 받으려면 가게를 빼야 하지 않겠느냐.”
     -30년 넘게 옷가게를 한 이숙자 씨

    하지만 건어물가게 주인 김윤숙씨는 다른 가게와 달리 물건 정리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했다. 이번 추석까지만 장사를 하는 것이다.

    “곧 있으면 추석 대목인데 그때까지 만이라도 장사를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봤지만 법원 관계자가 ‘그건 댁 사정’이라고 잘라 말했다. 날이 선선해지면 냉장고 물건들도 쉬이 상하지 않기 때문에 이사하기도 한결 쉬울 텐데…”
     -건어물가게 주인 김윤숙 씨

    시장 상인들만 아쉬운 것은 아니다.

    “대형 마트가 자꾸 생기고 재래시장이 사라지는 걸 보니 결국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영세 상인들이 할 줄 아는 건 하던 장사뿐인데 어디 가서 어떻게 살란 말인지…”
     -대림시장 인근에서 40년 넘게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상희 씨

    “상인 대부분이 60~70대의 여성이다. 남편의 벌이가 많지 않거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던 분들이다. 시장이 없어진다는 건 이들에게 일거리도 일거리지만 친구도 함께 빼앗기는 것이다. 전통시장과 대형마트는 경쟁이 안된다. 전통시장에서 장사하는 ‘없는’ 사람들이 버텨낼 수가 없는 현실이다.”
     -김윤희 상인회장

    이제 이곳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대림시장’이라는 버스정류장뿐이다. 상생의 논의는 있지만 해법은 막막한 상황에서 경쟁력 잃은 전통시장들은 오늘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상인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미리 해법을 찾지 못하면 연간 3천억원이 넘게 지원하는 정부의 도움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뒤늦거나 소용없는 일이다. 대림시장의 ‘해산’은 다른 전통시장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자영업 역사의 한 페이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