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대한민국은 세워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부수립 문제가 유엔의 손으로 넘어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뒤늦게나마 미국 정부가 소련의 팽창 야욕을 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인들은 동유럽과 이란에서 소련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뒤늦게나마 미국 정부도 반소 · 반공 노선을 따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가 내전으로 공산화(共産化)의 위험에 놓이게 되자, 미국은 1947년 3월에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적 · 군사적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선언’을 발표했다.
    그것은 이승만이 바라던 방향이었다.
       그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이 바뀌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조짐들이 보였다.

       미 군정청의 제3대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딘 소장이 1947년 4월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이승만의 심복인 임병직을 만난 사실이었다. 미군정이 지금까지 이승만에 대해 보여 주었던 비우호적인 태도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고 이승만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미 국무부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도 물러났다.     
       1947년 8월 국무장관 대리 로베트는 미⦁소공동위원회와 신탁통치안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안을 찾을 회의를 열자고 소련 · 영국 · 중국에 제의했다.

       예상했던 대로 소련은 즉각 거부했다.

       그러므로 새로 국무장관에 취임한 마셜은 9월 17일 앨리슨 계획에 따라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미국이 남한에서 정부를 세우는 쪽으로 정책이 굳어졌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미국에게는 남한에 빨리 정부를 세워놓고 ‘품위있게’ 철수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까지 남한은 주둔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남한이 공산화되든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유엔 총회 본회의는 1947년 11월 14일 표결에서 찬성 43, 반대 0, 기권으로 미국안을 채택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남북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승만이 바라던 바였다.
  • ▲ 좌우합작을 추진한 미소공동위원회, 미군정사령관 하지(왼쪽)와 북한의 소련 군정사령관 슈티코프.
    ▲ 좌우합작을 추진한 미소공동위원회, 미군정사령관 하지(왼쪽)와 북한의 소련 군정사령관 슈티코프.

    유엔임시한국위원단 안에서도 좌우합작론이 우세

       유엔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문제로 충돌했다.
       미국은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세워 놓은 다음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하자는 것인 데 반해, 소련은 미군과 소련군을 모두 철수시킨 다음 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7년 11월 14일의  유엔총회 결의안에 표시된 임무를 수행하도록 9개국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할 것도 결의했다.
       소련은 유엔의 자유총선거 결정이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유엔은 선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위원단은 9개국 대표로 이루어졌지만, 공산국인 우크라이나가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8개국만 오게 되었다.  
       1948년 1월 8일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환영대회에는 20만의 엄청난 군중이 모였다. 그만큼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김일성은 평양에서 개최된 군중대회에서 위원단이 북한에 한 발짝도 들여 놓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소련군사령관을 방문하겠다는 서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소련의 유엔대표인 그로미코가 소련은 유엔임시한국임시위원단에 참여하지도 않고 협조하지도 않을 것임을 유엔사무총장에게 통고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 ▲ 유엔한국위원단 단장 메논.
    ▲ 유엔한국위원단 단장 메논.

       서울에 온 유엔임시한국위원단도 남한에서만 정부를 세우는 데 대해 호의적이 아니었다.
    환영대회장에서 단장인 메논은 북한에도 애국자들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남한만을 협의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좌우합작, 남북협상의 가능성을 거론한 것으로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 역시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저 있었던 것이다.
       분개한 이승만은 항의 표시로 대회 도중에 자리를 떴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비롯한 우파 지도자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상대로 현실에 맞는 결정을 내려주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그 중심축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김성수(金性洙)였다.

       우선 단장인 인도 대표 메논부터 설득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소련 대사를 오랫동안 지냈을 정도로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인도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친소적인 대외정책과 사회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부단장인 시리아의 무길도 껄끄러웠다.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하는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좌파정부나 또는 좌우합작 정부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표들은 소련의 편을 들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8개국 가운데서 미국과 남한 우파를 지지할 나라는 필리핀, 중국, 엘살바도르의 3개국 뿐이었다. 그러므로 남한에 정부가 세워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자유총선거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설득시키기 위해 이승만과 김성수는 미 군정청 경무부장인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으로 하여금 영어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환영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환영대회, 환영만찬, 환영음악회 같은 행사를 열어 주었다.
  • ▲ 시인 모윤숙.
    ▲ 시인 모윤숙.

       특히 단장인 메논에게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다행히도 문학을 좋아하는 메논이 만찬 모임에서 여류 시인 모윤숙(毛允淑)을 만나면서 문제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문학적인 대화가 오가면서 메논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부단장인 시리아의 무길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미군 사령관과 소련군 사령관에게 자유총선거 실시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는 즉각 지지 회신을 보냈다.
       그러나 슈티코프는 서한의 접수 여부조차 확인해 주지 않다가, 결국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함으로써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북한에서 선거를 하게 되면 이미 만들어진 공산 정부가 해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고민에 빠졌다. 북한이 자유총선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유엔 본부와 상의하기 위해 유엔 한국위원단 단장인 메논이 뉴욕으로 갔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