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리더십①]기아차 인수 1년 만에 흑자전환…엔터프라이즈 타고 현장 강행군
  • [MK리더십] 현대기아차 통합 경영 15년

    [시리즈를 시작하며] 현대-기아차가 통합경영을 한지 15년. "함께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우려를 씻고 1999년 두 회사는 총매출 22조원에서 지난해 현재 134조원으로 15년만에 매출이 5배 이상 성장했고 영업이익은 현대차 8배(지난해 8조원), 기아차 70배(지난해 2조5천억)로 폭증하며 삼성전자와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쌍두마차로 자리 잡았습니다.

    초일류기업으로 손꼽히던 소니, 노키아가 초토화됐듯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늘날 글로벌 경제전쟁 시대에 현대기아차의 성공은 대기업은 물론, 의욕적으로 글로벌시장을 넓혀나가려는 벤처기업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현대기아차의 성공이 반드시 내일 또 다른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업전문가들은 지난 15년 숨 차게 달려왔듯 앞으로 노사가 협력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정진할 경우 '글로벌 빅3'까지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연관산업 효과가 막대한 현대기아차의 미래는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와 직결돼 있습니다. 뉴데일리경제는 현대-기아차 통합경영 15년을 계기로 정몽구 회장(MK)의 리더십과 현대기아차의 도약 과정을 분석하고, 향후 3세 경영 체제 앞에 놓여진 과제들과 현대기아차의 미래 전략, 정부 차원에서 자동차 산업에 지원할 부분들을 시리즈로 진단합니다. (편집자)

     

    “100년 역사의 강호가 즐비한데, 39년 신참이...현대차가 화제다.”

    2007년 기자가 찾은 도쿄 가와가나현 아쓰기 닛산자동차 디자인센터의 한 임원이 대화도중 던진 얘기다. 2000년대 후반부터 일본 자동차 업계가 현대차 연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던 상징적 장면으로 기자에게 각인돼있다.  

    2000년 현대그룹에서 분가해 나올 때만 해도 무명의 브랜드를 10년 만에 글로벌 명차 반열에 올려놓은 MK(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영문 애칭) 리더십의 실체가 몹시 궁금했을 터다. 

    그 궁금증의 실마리는 현대차가 기아차 채권단과 인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1998년 12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7월 침몰한 기아차가 경쟁사였던 현대차의 식구로 편입되는 한국 자동차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자, 글로벌 톱5 자동차 메이커를 탄생시킨 첫 걸음이었다.  

  • ▲ 기아차 화성공장. 1998년 현대차가 인수한 기아차는 1년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이 빛을 발했다ⓒ사진=현대차 제공
    ▲ 기아차 화성공장. 1998년 현대차가 인수한 기아차는 1년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이 빛을 발했다ⓒ사진=현대차 제공

     

    현대차는 19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세계 10위(생산 대수 기준)의 자동차 메이커로 부상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은 70%대로 치솟아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구축했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2000년 '왕자의 난' 끝에 자동차 소그룹을 이끌고 밀려나듯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왔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현대차를 위기 직전에 구해낸 셈이 됐다. 그 후 현대그룹은 대북사업 표류로 경영난에 빠져들었지만, 그룹에서 분리된 현대차는 '불똥'을 피해 순항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 "기아차 입찰가 100원"…숨가쁜 인수戰

    외환기위기로 경영여건이 악화된 현대차의 운명은 1998년 기아차 국제입찰을 둘러싸고 전기를 맞게 된다. 현대차는 정세영 당시 회장과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 양 진영이 각각 인수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룹내에서 기아차 인수를 동시에 두 군데서 진행한 부분은 잘 아려지지 않았던 후일담이다.  

    하지만 인수전 전략은 상이했다. 정세영 회장은 처음부터 기아차 인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외환위기로 위기를 맞고 있는 마당에 빚투성이 기아차를 인수할 경우 현대차마저 부실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정세영 회장측은 1998년 8월의 1차 입찰에서 기아차의 입찰가를 100원으로 써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대로(大怒)했고, 그 후의 입찰은 MK에게 일임했다. MK는 10월의 3차 입찰에서 삼성과 대우를 제치고 기아차 인수권을 따냈다. 그해 12월 정명예회장은 MK를 현대차 및 기아차 회장에 임명한다. 자동차 대권이 MK에게 넘어온 것이다.

    평사원에서 부회장까지 현대차에서 30년 이상 일하며 잔뼈가 굵은 박병재 전 현대차 부회장은 최근 한 측근을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90년초 현대차는 2000년까지 글로벌 톱 10에 오르겠다는 비전을 내놓았습니다. 현대차로서 벅찬 목표였죠. 기아차 인수 1년 만에 그 꿈은 일찍 다가왔습니다." 

    그는 또 당시 MK를 이렇게 평가했다.

    "경영자로서 결심한 일을 추진해 이뤄내는 건 세계에서 1등입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지향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성취하죠. 경영자로서 아주 필요한 자질입니다." (박 전 부회장은 故 정주영-정세영 회장의 1세대와 정몽구 현 회장의 2세대(2002년까지)에 이르며 현대차 최전방을 책임졌다.)
     

  • ▲ 기아차 화성공장. 1998년 현대차가 인수한 기아차는 1년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이 빛을 발했다ⓒ사진=현대차 제공

     

    ◆ "토요타도 화들짝" 기아차 부활의 秘訣

    MK가 떠맡은 기아차의 상태는 어땠을까. 30여 년 전으로 시계추를 되돌려보자.

    디자인 혁신으로 승승장구하던 지금과는 거리가 먼 회사였다. 독자적인 디자인이란 게 없었다. 일본 디자인을 들여와 팔거나 유럽차를 조립해 생산했다. 정부가 단행한 공업합리화 조치 탓에 1981년부터 한동안 승용차를 만들지도 못했다.

    트럭과 버스만 만드는 회사가 된 것이다. 기아차는 예쁘고 멋진 디자인의 자동차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튼튼한 운송수단 제조업체였다. 타이탄, 복사라는 이름의 트럭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언덕길을 올라가는 모습은 지금 40대 이상 중장년층에겐 흔한 광경이었다. 현대차의 인수당시 기아차 적자는 6조 4000억원에 달했다.

    MK는 12월 초 유기철 현대정공 부회장(기아차 부회장을 지낸 후 정년퇴직) 등 임원 30여명과 기아차에 입성한 이후 숨가쁘게 정상화를 진행했다. 기아차 충남 아산공장(現 화성공장)과 경기도 소하리 공장, 아시아차 광주공장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문제점을 잡아나갔다.

  • ▲ 기아차 화성공장. 1998년 현대차가 인수한 기아차는 1년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이 빛을 발했다ⓒ사진=현대차 제공

     

    재미있는 사실은 MK의 공장점검 강행군에 기아차의 대형세단 엔터프라이즈를 자신의 전용차로 애용한 것. 현대차 사장단에도 엔터프라이즈 이용을 적극 권유하면서 당시 현대차 임직원의 기아차 이용이 점차 확산되기도 했다.

    현대차에서 특명을 받고 자리를 옮긴 김수중 기아차 사장은 두 회사의 합병이후 품질과 생산 능력 확보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절감했다. MK는 이같은 보고를 받고, 엔진공장 신규건설과 현대차 플랫폼 공유라는 특단을 내린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 ‘갤로퍼 신화’로 노하우를 쌓은 MK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한 닛산 토요타 등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현대차에 대한 연구 붐을 일으킬 때 이들이 가장 경탄한 ‘모듈 경쟁력’이 여기서 출발한다. 주요 부품의 모듈화를 토대로 한 유연한 플랫폼 공유는 신차 개발 비용을 낮추고 규모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다. 현대차그룹의 주요 부품공급사인 현대모비스가 본격적으로 약진한 때도 99년부터이다.

    이같은 전략아래 카니발을 제외한 기아차 라인업이 송두리째 바뀐다. 주력모델이된 카니발, 카스타, 카렌스 등 RV(레저용차)차량인 이른바 ‘카3총사’는 계약이 수개월씩 밀릴 정도로 인기를 끌며 정상화에 가속이 붙었다.

    여기에 MK의 제조공정 혁신은 기존 기아차 조립방식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서브 라인 폐지와 축소, 작업 공정 단축으로 인한 작업인원 감축 둥은 가격경쟁력과 직접 연결됐다. 지금까지 자사 부품 생산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도요타와 비교해 무척 공격적인 방식이다. 

    MK의 도전은 대성공이었다. 1997년 부도 이후 1년 8개월만에 85만5700대라는 판매고를 올리며 대우차를 제치고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자본잠식 상태에서 1년 만에 1357억원의 창사 이래 최대흑자란 기록도 남겼다. 현대차도 기아차 인수를 통해 연간 생산능력을 288만대로 늘려 세계 10위권의 덩치를 갖춘 것과 함께 국내 자동차시장의 70%를 석권하게 됐다. 기아차의 정상화는 그렇게 실현됐다.

     

  • ▲ 기아차 화성공장. 1998년 현대차가 인수한 기아차는 1년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이 빛을 발했다ⓒ사진=현대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