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에게 대리권 있다고 믿을 '정당한 사유' 있으면 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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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자 A] 사업 관계로 외국에서 2년 가까이 체류했습니다. 그러나 사업을 꾸려나간다는 건 쉽지 않았고, 운전자금을 조달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때마침 제가 우리나라 00은행에 제 명의의 적금통장을 만들어놨고, 만기에 달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이를 찾기 위해 일시 귀국했습니다.

    은행을 찾았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미 부인께서 해당 통장을 해약하셨다”는 겁니다. 그 통장은 분명 제 신분증과 제 도장을 이용해서 만든 제 통장인데요. 물론 제가 외국에 간 후라, 불가피하게 아내에게 제 신분증과 도장을 주면서 통장을 대신 발급받으라고 시키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 동의도 없이 은행이 임의로 제 통장을 해약한 행위는 잘못된 것 아닌가요?


    [B 은행] 통장 명의가 A 씨 이름으로 돼 있긴 하지만, A 씨가 출국한 후, 그의 처인 C 씨가 그의 주민등록증과 인감을 지참한 채 예금거래를 지속해왔습니다. 해당 통장은 적금통장인데, 적금 납입이 C 씨의 통장에서 이루어졌단 해왔다는 얘깁니다.

    A 씨가 해외에 체류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2년 가까이 이런 거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도 없습니다. 저희 입장에선 A 씨가 C 씨에게 유효한 대리권을 부여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해지가 부당하다는 A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해설] 원칙적으로만 보면 배우자의 요청 만으로 본인의 예금을 해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배우자의 ‘표현대리’를 인정할 것인가가 문제되겠군요.

    표현대리(表見代理)란 실제로는 유효한 대리권이 없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본인을 대리할 권한이 있다고 믿을 사항일 경우, 이미 발생한 거래를 유효하게 인정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처가 해외체류중인 남편의 대리인으로써 부동산을 매수한 후, 남편 명의로 소유권 등기까지 마친 경우, 실제로 남편이 처에게 대리권을 부여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은 대리권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겠죠(대법원 판례 1984.11.27., 84다310, 84다카1283). 이를 인정하자는 게 표현대리인 것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남편 A가 해외로 출국하면서 아내 C에게 신분증, 인감도장 등을 교부해 예금거래를 하도록 한 점, A가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C가 예금거래를 해온 사실 등을 비추어보면 해약에 대해서도 A의 유효한 대리권을 갖고 있다고 B은행은 신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의 판단(1999. 10. 12, 조정번호 제1999-46호)입니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이 외에도 배우자에게 가사대리인이 있는 점, 예금 해약 사유가 A씨의 해외체류기간 중 생활비 등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인 점도 감안해서 해당 예금 해지가 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같은 분쟁의 씨앗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본인이 관리하는 예금은 본인이 명의로 해 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특히 오는 11월 말부터 강화된 금융실명법이 실시된다고 하니, 앞으론 실명거래를 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