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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정치권과 그 언저리에서 기웃대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회장의 '기업 키우기'는 인맥쌓기와 로비였다. 일찌감치 정경유착의 맛을 본 그는 오래전부터 정치권 줄대기의 달인이었다.
20여년전인 1992년 당시 한준수 연기군수가 양심선언을 했다. 이 모 충남지사에게 돈을 받아 금품을 뿌렸다는 주장이었다. 자금출처를 조사해보니 성 전회장이 사장으로 있던 대아건설이었다. 일련번호가 찍힌 90여장의 수표 모두가 대아건설이 발행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민자당 재정위원이었다. 지방의 소규모 건설사인 대아건설은 80년 성 전 회장 인수 무렵 토건분야 전국도급순위 169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10여년새 무섭게 성장했다. 91년 72위, 92년 대전 2위 전국 61위로 올라섰다.
동향 출신의 조 모 전직 군수를 부사장으로 영입한 뒤 내무부장관을 지낸 안 모 지사에게 줄기찬 로비를 한 대가였다. JP의 뒷배설도 무성했다.
이무렵 국감에서는 대아건설이 88년 이후 충남도 발주관급공사에서 51건을 수주하면서 평균 98.62%의 낙찰률을 기록한 게 화제가 됐다. 예정가 끝전에 불과 1만원 차이의 응찰가들이 수두룩했다. 공사예정가 유출의혹과 편법낙찰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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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93년 코스닥에 등록한 대아건설은 서울까지 무대를 넓히며 더욱 날개를 달았다. 94년 대전지역민방 사업자 경쟁에 뛰어들었다. 동양강철 건양대 코리아나화장품 등 대전충남 23개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하며 우성사료 종근당 등과 맞섰지만 고배를 마셨다.
95년 대한건협 부회장이 된 그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황산성 변호사, 송자 연대총장, 동국무역 백영기 회장 등과 함께 한가람회를 조직해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가람은 로타리나 라이온스에 대항해 발족한 사회봉사 조직으로 소외계층을 위한 음악회 개최 등 문화지원 활동을 했다.
96년에는 전국 2위의 농산물 유통법인인 중앙청과를 인수한 뒤 이를 매개로 우리홈쇼핑 주주가 됐다.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던 서울지역 재건축 1000가구를 수주하며 대아의 이름을 알린 것도 이 즈음이다.
97년에는 뜻밖에도 YS측과의 돈 거래 사실이 드러났다. 대검 중수부는 김현철씨가 대아측으로부터 대전민방 협조 명목으로 10억원을 받은 혐의를 찾아냈지만 성 전회장은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조사결과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이 관리하던 현철씨의 돈 50억원이 대아건설 등 4-5개업체에 건너간 사실 확인되기도 했다. 이 때 중수부장이 심재륜 검사였다. 이 무렵에도 성 전회장은 기라성같은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신한국당 재정위원 30명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99년 목원대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사회환원계획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그렇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식 대신 그의 형제들이 모두 대아의 요직을 독차지했다. 대표인 성 전 회장을 필두로 둘째인 우종씨가 부사장, 셋째인 석종씨가 기획조정실장, 막내인 일종씨가 이사였다.
2001년에는 난데없이 보물선 테마주로 각광받으며 한해 매출을 50% 이상 끌어올렸다. 그 해 온양관광호텔도 사들였다. 어느새 전국 도급순위 37위까지 올라섰다.
2002년에는 여야 양쪽에 대선자금을 제공하며 '보험'을 들었다. 노무현 후보 캠프에 3억원을 전달한 것이 드러났다. 이회창 후보 캠프에 전달한 액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당선권 보장을 전제로 자유민주연합에 정치자금 16억원을 제공한 것도 이 때였다. 득표율 미달로 국회입성에 실패한 그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2005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드디어 2004년에는 경남기업의 채권단 보유지분 51%를 703억원에 인수해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확보했다. 2007년 행담도 개발 비리에 연루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지만 몇 달 안 돼 또다시 특별사면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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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당시 한나라당으로 배를 갈아탔다. 박근혜·이명박 후보 양측에 선을 대던 그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는 선진통일당 원내대표로 새누리당과 합당 협상을 주도했고 친박계 인사들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꿈에 그리던 국회 입성에도 성공했다. 국회의원 시절 그는 유독 금융감독 당국과 은행 등을 관장하는 정무위에 집착했다. 직무 관련성이 있는 정무위에서 활동하려면 경남기업 주식 지분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해야 했지만 행정소송까지 하며 이를 거부하다 지난해 6월 선거법 위반혐의로 낙마했다.
야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권노갑 접촉설, 반기문 측근설, 이완구 지원설 등 숱한 화제를 뿌렸지만 사정 대상으로 지목된 뒤 끝내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수성가의 뒤에 가려진 30년 로비인생의 막은 결국 '허방'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