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납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 열려
  • ▲ 박순발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 박순발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I. 머리말

    풍납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에 있었으니 지금 54년이 경과하였다. 3~4m의 퇴적토에 묻혀 있는 토성의 면모를 밝히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였던 첫 조사 이후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더불어 이 성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 후 36년이 경과한 1997년 성내 공동주택을 건축하기 위한 공사 중 마침내 풍납토성 진면모의 일단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확인되어 이제 풍납토성은 백제가 지금의 서울에 도읍하던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 데에는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에 대한 성격을 둘러싸고 학계의 인식이 널리 공유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한데, 이 글을 작성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사실 관계를 먼저 적시한 다음, 그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 관련 문헌사료들도 살펴볼 것이다.

     

    그러한 논의를 진행하기 앞서 먼저 도성이라는 용어의 개념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풍납토성의 성격과 관련하여 ‘왕성(王城)’, ‘도성(都城)’,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위례성(慰禮城)’ 등 다양한 용어가 혼재하기 때문이다.

     

    도성은 국가 단계로 성장한 정치체의 중심지, 즉 중심취락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한 나라의 수읍(首邑) 혹은 수도(首都)를 말한다. 도성이라는 용어가 성립된 중국의 경우 주(周) 왕이 직접 다스리는 성읍을 일컬어 ‘국(國)’이라 하고, 봉건 제후들이 다스리는 성읍은 도(都)라 하였다. 이 경우 주왕이 다스리는 수읍은 곧 ‘왕성(王城)’이 되며, 고유명사로서 국(國)이라 부르고 제후의 성은 도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주왕을 정점으로 하는 종주(宗周) 관념이 희박해지면서 전국시대 이후에는 그러한 구별의 의미가 무의미해져 모두 도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천자가 왕에서 황제로 바뀐 진시황(秦始皇) 이후 왕성이라는 용어도 그 명칭의 권위는 없어졌으며, 황제의 거장소(居場所)는 도성으로 통칭되었다.

     

    국가 사회의 도성에는 최고 지배자의 공간인 궁(宮)과 도시적 거주민이 집주하는 민리(民里)가 주요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는데, 궁을 보위하는 내성(內城)과 민리를 방호하는 외곽(外郭)이 내외 2중성의 형태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내성외곽이라 한다. 이 경우 황제 혹은 왕이 거주하는 내성을 일컬어 궁성(宮城)이라 하고, 궁성 외부의 민리를 포괄하는 성벽을 외곽성이라 한다.

     

    풍납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기간 동안 도성을 구성하던 성임은 물론이다. 문헌사료에 전하는 당시 백제 도성 명칭은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한산 등이 있는데, 위례성은 위례(慰禮), “아리수(阿利水)”의 ‘아리’나 “욱리하(郁里河)”의 욱리와 소리값이 유사하여 모두 크다는 뜻의 ‘한’을 의미한다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이다. 따라서 ‘한성(漢城)’은 위례성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며, 하남위례성은 한강의 남쪽에 위치한 위례성이라는 의미로서 백제의 도성에 대한 통칭임을 알 수 있다.

     

    한산은 백제의 도성 지역인 한성에 있는 산지성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서 근초고왕이 ‘이도한산(移都漢山)’한 사실로 미루어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학계의 통설이다. 한편, 개로왕 21년 고구려에 의한 한성 함락 사실을 전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해당 기사에서는 당시 백제 도성을 구성하고 있는 2개의 성에 대해 각각 ‘북성’과 ‘남성’, 혹은 ‘대성’과 ‘왕성’이 짝을 이루고 있어 풍납토성은 북성 혹은 대성으로, 몽촌토성은 남성 혹은 왕성으로 부르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II. 풍납토성, 백제국(伯濟國) 국읍에서 백제(百濟) 도성으로 전환되다

     

    1997년 풍납토성 내부에서 3중의 환호(環壕)가 발견되었다. 환호는 거주 공간의 외곽을 따라 인위적으로 호를 파서 그 경계를 표시하거나 외부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6000년 무렵에 이미 등장하였지만, 한반도 지역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의 청동기시대부터 출현하여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까지 지속된다.

     

    원삼국시대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에 속한 여러 정치체들이 공존하고 있었던 때로서 백제의 전신인 백제국(伯濟國)도 그 일원이었다. 지금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예로 보면 삼국지(三國志) 찬자가 ‘국(國)’으로 불렀던 삼한 정치체들의 국읍은 이와 같은 환호에 의해 그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연기 응암리, 양산 평장리, 홍성 석택리, 대전 용계동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풍납토성은 백제가 국가 단계로 성장하기 이전부터 마한 백제국의 국읍이었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 내부 조사를 통해 늦어도 2세기 무렵의 낙랑계 유물이 출토되는 정황은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풍납토성 성벽의 축조 시점 확인을 위해 그간 모두 3곳을 절개조사한 바 있다. 그를 통해 풍납토성이 성벽으로 전환된 시점은 300년을 전후한 무렵으로 확인되었다(이성준·김명진·나혜림,2013). 이 연대관은 토성 축조토 내부에 혼입된 낙랑계 토기 자료 및 방사성탄소 연대 등을 종합한 결과로서 현재 학계의 공인을 받고 있다.

     

    풍납토성 축조에는 막대한 공역이 소요되었는데, 추산에 의하면 적어도 연 100만명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이 정도의 인력을 동원하여 축성할 수 있는 정도의 행정적 재정적 역량은 이전의 마한 소국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움은 물론이므로 정치체의 중심취락을 성벽형태로 전환하는 현상은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 등 고대 한반도 삼국의 국가 성립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기도 한다. 성벽취락의 등장은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국가 성립기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고고학적으로 국가 출현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한다(朴淳發,2012).

     

    아무튼, 풍납토성이 환호에서 성벽으로 그 외곽을 전환한 시점은 3세기 말~4세기 전반으로 확인되었으므로 백제의 국가 성립 시점은 적어도 그보다 이른 시기일 것이며, 필자는 구체적으로 3세기 중후엽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은 환호단계에서 탈각하여 이제 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중심지, 즉 도성으로 변모한 것이다.

     

    한편 이 무렵 몽촌토성도 축조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성벽 절개조사 결과가 많지 않아 다소 조심스러운 점은 있으나 동북 성벽 절개시 성내부 퇴적토층에서 전문도기(錢文陶器)가 출토되어 축조 하한 시점이 3세기 말~4세기 초 무렵으로 비정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몽촌토성은 371년 근초고왕이 ‘이도한산’한 곳으로 비정되지만, 성벽의 축조는 그 이전으로 소급된다. 백제의 국가 성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성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2개의 성이 줄곧 공존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두성 가운데 어느 성이 먼저 축조된 것인지 여부는 아직 좀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기왕의 3중 환호로 된 국읍을 성벽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몽촌토성이 등장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드러난 조사 결과로 보면 몽촌토성은 궁을 중심으로 한 왕의 공간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시점은 371년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풍납토성 내에 왕궁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도한산’ 이후인 아신왕(阿莘王)이 ‘한성별궁(漢城別宮)’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즉위년조의 기사는 그러한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현시점에서 ‘한성별궁’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도한산 이후의 정궁이 몽촌토성이라면 그것은 이전의 왕궁인 풍납토성의 궁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III. 백제의 초기 왕궁이 소재하였던 풍납토성

           
    도성의 핵심 시설은 궁이다. 국가 성립기의 도성인 풍납토성에는 당연히 왕궁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해서는 아직 그 모습을 찾지 못하였다. 사실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 신라 등 한국 고대 삼국을 통털어 국가 성립기의 왕궁은 미지의 상태이다. 그리고 도성의 성벽취락 내부에서 구체적인 왕궁의 위치 역시 추정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를 비롯한 한국 고대 삼국의 왕궁의 위치나 모습을 이해함에 있어 당시 중국의 도성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고대 도성은 다음과 같은 7개의 유형으로 분류 가능하다(朴淳發, 2014a). 1유형은 지배층의 거소로서 궁이 아직 민리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서 하(夏) 이전 시기로 비정되는 도사(陶寺)유적이 대표적이다.


    2유형은 궁이 자체의 방어시설을 구비하여 독립된 궁성형태로 등장하는 것으로서 하(夏)의 二里頭가 전형이다. 궁성 주변에는 취락형태의 도성 주민 거주역이 모여 있어 이른바 읍리(邑里) 형태의 민리가 등장하고 있다.
         

    3유형은 읍리 형태의 주민 가운데 일부, 즉 대체로 상위층과 수공장인등 직능집단이 도성 외곽내부에 배치된, 내성외곽형(內城外郭型) 도성이다. 언사(偃師) 상성(商城)이 전형적인 예이지만, 노국(魯國)도성이나 연국(燕國) 도성 등 서주 시기의 제후국 도성도 내성외곽형을 유지하고 있어 서주 시기의 일반적인 도성 형태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4유형은 궁성이 외곽의 중앙에 위치하던 3유형과 달리 모서리의 한 부분에 치우쳐 독립성이 높아진 형태이다. 거민구 자체가 하나의 성벽취락으로 확대된 모습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도성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5유형은 전국시대가 마감되면서 진(秦)의 함양(咸陽) 도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다수의 궁성 주변에 민리들이 광범위하게 산재하는 형태이다. 궁성과 민리의 관계상으로는 2유형과 다르지 않으나 도성 민리의 규모 상으로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6유형은 204년에 건설된 조위(曹魏) 업성(鄴城)에서 비롯된 새로운 유형으로서 단일 궁성이 도성의 북단에 위치하고 그 남쪽에 가로망을 경계로 한 격자상의 민리가 배치된다. 이후 동아시아 고대 도성 민리 구획의 전형으로 자리 잡아 중국은 물론 한반도·일본열도 등의 고대 도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유형은 이전의 도성에서 그 기원을 찾기 어려워 그 기원을 둘러싸고 서역 등 서방기원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아직 설득력 있는 정설이 없다.

     

    7유형은 6유형 외부에 다시 외곽이 부가됨으로써 궁성이 전체 도성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 것으로서 송(宋) 동경성(東京城)에서 시작되어 이후 금(金) 중도(中都) ․ 원(元) 대도(大都) ․ 명청 북경성(北京城) 등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유형의 도성 형태이다.

     

    풍납토성이 조영될 무렵의 중국 도성은 6유형으로서 궁성은 전체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가 이러한 도성제를 수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알 길이 없으나, 풍납토성과 거의 같은 시기인 341년에 조성된 전연(前燕)의 도성인 요녕성 조양(朝陽) 용성(龍城)은 도성의 북단에 궁성이 위치하고 있어 참고가 되며, 당시 백제와 수교하던 동진의 건강성(建康城) 역시 6유형이므로 백제의 왕궁의 위치는 도성의 북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풍납토성 일대에 대한 고지형 분석 결과(이홍종,2015)를 보면, 성의 북쪽 지역의 지형이 남쪽에 비해 원지반이 높아 왕궁과 같은 현저한 건축물의 입지에 적합한 것으로 드러난 점도 왕궁의 위치 추정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기왕에 확인된 경당 44호 건물지는 사방에 구(溝)를 돌리고 전면에 제사 유구, 우물, 조경시설 등이 배치된 점으로 미루어 높은 기획성을 가진 시설로 판단된다. 주거지 형태의 건축물 주변에 땅을 파고 묻는 제사 유구가 수반된 점으로 보아 종묘(宗廟)와 같은 국가적 제의 시설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 이후 종묘가 궁의 밖에 배치되므로 궁은 종묘의 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배치 원리를 감안해 보아도 풍납토성의 왕궁은 적어도 경당 44호 건물지의 북편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풍납토성 내에는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망과 더불어 남북 도로망도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도로망의 구성으로 보면 종묘로 판단되는 경당 44호 북단에 있는 동서 도로망의 북측 지역이 왕궁의 입지로는 가장 유력하다.

     
    IV. 백제 왕궁의 모습, 조위·서진 낙양궁성 복원도
         

    백제 왕궁의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문헌사료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참고가 되는 것이 중국의 역대 궁성의 변천 양상이다. 상대(商代) 이래 중국의 역대 도성 궁성은 외조(外朝) 정전-내조(內朝) 정전-후침(後寢) 등 3진 원락 구조로 정착이 되어 청대까지 지속된 점을 참고하면, 백제의 왕궁 역시 그러한 구조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정궁은 아니지만 익산 왕궁리에 남아 있는 사비기 백제의 왕궁을 통해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박순발,2014b).

     

    풍납토성에서는 지금까지 미래마을 지점에서 대형 지상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는데, 주초(柱礎)는 모두 땅을 파낸 다음 다시 흙과 자갈로 다져 채운 이른바 상돈(磉墩) 방식으로 조영되었다. 이와 동일한 상돈은 동시기 중국뿐 아니라 익산 왕궁과 같이 사비시기의 백제 왕궁 조성시에도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풍납토성에서 발견될 왕궁 역시 지상 건물지로서 상돈 방식의 주초로 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익산 왕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왕궁의 외부는 궁장(宮墻)이 돌려져 있을 것이다.

     

    지금 경주 월성에서는 신라의 왕궁을 찾기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머지않아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백제 도성 최초의 왕궁 소재지인 풍납토성의 위상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묻혀 몰각의 위기에 처하고 있어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