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수차례 테스트 거쳐 가능성 확인1~2년 내 글래스 형태 '릴루미노' 개발에 박차
  • ▲ 조정훈 삼성전자 C랩 크리에이티브 리더. ⓒ뉴데일리
    ▲ 조정훈 삼성전자 C랩 크리에이티브 리더. ⓒ뉴데일리
    "와! 보입니다, 보여요!" 

    삼성 기어VR을 쓰고 '릴루미노' 앱을 실행시킨 한 시각 장애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와! 네 얼굴이 보인다. 그 옆에는 단발머리 여자분이 있죠?"라고 말하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삼성전자 '릴루미노'팀 식구들의 손에는 땀이 났고 이내 가슴이 뜨겁게 벅차 올랐다. '릴루미노'의 실현 가능성을 처음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뉴데일리경제는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상용화까지 '릴루미노'를 이끌어 온 조정훈 삼성전자 C랩 릴루미노팀 크리에이티브 리더(CL)를 최근 직접 만났다. 

    조정훈 CL은 "주변에 시각장애인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 시각 장애에 대한 정보나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며 "우연히 TV에서 다수의 시각 장애인들이 TV 시청을 즐긴다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흔히 시각장애인을 떠올리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짚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알고보니 국내 시각장애인 중 86%는 잔존 시력이 남아있는 저시력이라는 것을 알게됐다"며 "그렇다면 삼성전자가 할 수 있는 기술을 활용해 잘 보일 수 있는 뭔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 CL은 즉시 이 아이디어를 삼성전자 사내 벤처 프로그램인 C랩에 제출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채택되고 곧바로 아이디어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시작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는 "2016년 6월, 시각 장애인을 위한 VR 기기를 만들고 싶다는 아이디어 제안을 했고 채택이 됐지만 한동안은 팀원 없이 혼자서 연구를 해야만 했다"며 "이후 사내 멤버 모집을 해서 2명이 합류했고 현재는 3명이 추가돼서 현재 6명이 릴루미노팀에 소속돼 있다"고 말했다.

    야심차게 시각장애인을 위한 VR 기기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막상 주변의 우려는 그를 주눅들게 했다. VR이라는 기기 자체가 시각장애인을 고려해서 만든 제품이 아니다 보니 기능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용방법까지도 모든게 시각장애인들이 쓰기엔 불편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되겠어? 진짜 가능하겠어?" 

    조 CL은 "10명 중 9명은 기대가 아닌 우려를 표했다"며 "내심 자신은 있었지만 주변의 우려가 커지다 보니 의기소침해졌지만 꼭 성공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각장애인은 색과 색 사이의 구분을 잘 하지 못해 사람과 사물, 배경을 인지하지 못하는 등 대비감도가 많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 대비감도를 정확히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넣어서 릴루미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주변의 우려를 하루 빨리 불식시키고 싶다는 욕심에 조 CL은 팀이 꾸려진지 2달 만에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비록 엉성했지만 핵심 기술만 실현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프로토타입 제품을 시각장애인에게 테스트했다. 모두가 숨죽이며 바라보는 사이 시각장애인은 프로토타입을 끼고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보던 그는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뗐다.
  • ▲ 조정훈 삼성전자 C랩 크리에이티브 리더(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스파이크스 아시아 2018'에서 '릴루미노'로 이노베이션 부문 이노베이션 스파이크를 수상했다. ⓒ뉴데일리
    ▲ 조정훈 삼성전자 C랩 크리에이티브 리더(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스파이크스 아시아 2018'에서 '릴루미노'로 이노베이션 부문 이노베이션 스파이크를 수상했다. ⓒ뉴데일리
    "하나도 안 보여요." 

    조정훈 CL은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머릿속이 노래졌다. 아 망했구나, 내가 회사에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한 꼴이 됐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프로토타입의 실패는 '릴루미노'를 성공케 한 단단한 초석이 됐다. 

    그는 "프로토타입 테스트 후 내가 왜 실패했을까에 대해 정말 깊게 생각했다"며 "그 과정에서 설정했던 가설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도록 개선할 수 있는지 감을 잡았다"며 "허점을 보완하는 긴 과정을 거친 뒤 드디어 시각장애인 테스트에서 처음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릴루미노'는 다양한 시각장애인들의 테스트를 거쳐 보완을 거듭하면서 상용화에 성공했다. 임상실험 결과, 눈 앞 30cm 이내에서 사물을 구분하고 확인할 수 있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에 한해서 릴루미노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삼성전자 기어 VR을 소유한 시각장애인은 오큘러스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릴루미노' 앱을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다. 제품 인증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만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다운로드 수가 1200건을 넘어섰다. 

    조정훈 CL은 "시각장애인과 관련한 유명한 해외 논문을 여러편 읽고 이를 적용했지만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릴루미노를 만들면서 이론은 이론일 뿐 내가 직접 해보기 전에는 이론에만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제품의 실 사용자들인 시각 장애인들이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피드백을 줬고 이를 바탕으로 릴루미노를 완성했다"며 "모든 시각 장애인의 반응을 바탕으로 업데이트 과정을 거쳤다"고 전했다.
  •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 제일기획과 함께 '두개의 빛:릴루미노'라는 온라인 단편 영화를 제작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이를 통해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광고제인 스파이크스 아시아(Spikes Asia) 2018에서 '릴루미노'는 이노베이션(Innovation) 부문 금상급인 이노베이션 스파이크를 수상했다. 

    올해 1월에는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에서 '릴루미노 글래스' 시제품을 선보였다. 향후 1~2년 내 개발을 목표로 릴루미노팀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정훈 CL은 "릴루미노가 잘 보이긴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이 기어 VR을 쓰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꺼려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며 "일반 안경과 같은 형태의 글래스 제품을 상용화 하는 것이 릴루미노팀의 다음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릴루미노는 라틴어로 빛을 되돌려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아주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지만 이를 현실화 한 릴루미노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빛과 함께 희망을 돌려주고 싶다"는 진심어린 소망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