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발표된 3기 신도시 영향권에 속한 1‧2기 신도시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동안 규모에 비해 자족도시로서의 기능이 미미한 고양일산과 광역교통망 체계로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파주운정, 주위에 3기 신도시가 지속 들어서고 있는 인천검단 지역민들이다.
당장 급매물이 추가로 쏟아지거나 가격이 급락하진 않겠지만, 매수세가 끊기면서 중장기적인 침체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인 12일 고양일산, 파주운정, 인천검단 등 3개 신도시연합회는 오후 6시30분부터 2시간여 동안 파주 운정동에서 '3기 신도시 지정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경찰 추산 500명이 모였다.
집회에 참여한 주민들은 △고양 창릉지구 3기 신도시 지정 취소 △고양시장의 주민 소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해임 등을 요구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7일 경기 고양시 창릉과 부천시 대장 등 28곳에 11만가구를 공급하는 '제3차 신규택지 추진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지난해 9월 17곳에 3만5000가구, 같은 해 12월 남양주시 왕숙, 하남시 교산, 인천 계양 등 41곳에 15만5000가구를 공급하는 1‧2차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3차 계획을 공개함으로써 수도권 86곳에 총 30만가구를 공급하는 계획안을 마무리했다.
연합회 측은 "경기 북부의 1·2기 신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들다"며 "턱없이 부족한 자족도시 기능과 열악한 광역교통망으로 서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정부는 창릉동 3기 신도시 지정을 기습 발표해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3기 신도시 3만8000가구를 포함해 현재 예정된 9만500가구가 고양시에 입주하게 되면 타 지역에 비해 아파트값이 크게 하락하게 된다"며 "지역노령화와 외국인 유입 증가, 슬럼화에 따른 치안 악화 등이 예견되는데 대책이 없다"고 규탄했다.
-
무엇보다 기존 신도시 주민들은 정부 부동산 정책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고 지적했다. 2기 신도시와 광역교통망이 아직 제대로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3기 신도시 정책을 발표해 상당수 2기 신도시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는 얘기다.
특히 3기 신도시를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의 특혜가 잇따르면 2기 신도시는 교통 불편이나 집값 하락 등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일례로 2기 신도시인 운정신도시의 경우 3지구가 아직 분양을 못하고 있고, 검단신도시도 부동산 경기 침체로 사업이 지연되다 올해부터 분양에 들어갔다. 공급물량이 여전히 많이 남은 상황에서 3기 신도시가 인근에 들어서면 수요자들이 몰리면서 2기 신도시 분양은 연기되고 지역개발도 정체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기존 신도시 주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광역교통망도 순서가 뒤바뀌고 있다. 정부는 3기 신도시 광역교통망인 고양선(가칭)과 슈퍼간선급행버스(S-BRT), 수도권지하철 3호선 연장 사업 등은 예타조사를 받지 않는 방식으로 추진키로 했다. 100% 광역교통부담금으로 추진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비 전액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대다수 2기 신도시는 아직 제대로 된 광역교통망을 갖추지 못했다. 김포한강신도시의 김포도시철도는 당초 지난해 개통 예정이었으나, 올해 7월로 미뤄졌다.
위례는 입주 7년 차에도 위례~신사선과 트램 사업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운정신도시가 포함된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A노선의 경우 지난해 착공식을 하고도 여전히 삽도 뜨지 못한 상태다.운정신도시 주민 A씨는 "국가정책에도 순서가 필요하다"며 "3기 신도시 지정보다 지하철 3호선을 운정까지 확정해 조기 건설하는 등 기존 신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재현 리얼투데이 본부장은 "1기 신도시의 경우 입주 30년이 다가오면서 재건축을 염두에 둬야 할 시점이고, 2기는 아직 광역교통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이를 서둘러야 할 시점인데, 3기 조성으로 이런 장·단기 계획들이 밀리게 됐다고 인식하면서 지역민들이 분노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작 서울에 집중해야 할 공급정책이 수도권에서 이뤄지면서 정부 계획이 탄탄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신도시 주민들에게 불만"이라고 설명했다.
-
이들이 우려하는 지역 부동산 침체의 경우 이미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매수세가 실종됐다.
일산서구 J공인 대표는 "고양 원흥·삼송지구 등 인근 새 아파트 입주로 이 일대가 대규모 베드타운이 됐는데, 또 다시 일산신도시 절반 수준의 신도시가 들어선다고 하니 누가 집을 사겠냐"며 "신도시 발표 후 매수문의는 한 통도 없고, 기존에 매물을 내놨던 집주인들한테 얼마를 더 낮춰야 집이 팔리겠냐고 걱정하는 전화만 온다"고 말했다.
비단 3기 신도시뿐만 아니라 대출·청약규제 등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지역 부동산 경기가 더 침체된 것으로 보인다.
고양의 경우 킨텍스 일대 주거시설이 분양할 당시 청약경쟁이 과열되면서 2016년 11.3대책에 따라 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됐고, 이에 따라 전매제한기간과 1순위 규제 등도 강화됐다. 이후 서울과 같은 과열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규제에 치여 주택시장은 부진했다.
국토교통부와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일산서구의 주택거래량은 2017년 7127건에서 지난해 4900건으로 31.2% 급감했다. 같은 기간 정부 규제가 집중된 서울 주택거래량이 18만7797건에서 17만1050건으로 8.91% 줄어든 것에 비해 감소폭이 더 컸다. 일산서구는 올해 1분기 거래량도 지난해 1년치 거래량의 14.7%인 721건에 그쳤다.
I공인 관계자는 "2017년 청약조정지역으로 지정되고, 지난해 9.13대책 유탄까지 맞으면서 집값이 역주행하고 있는데, 서울과 더 가까운 곳에 신도시를 짓는다고 하니 망연자실한 분위기"라며 "가뜩이나 거래도 안 되고 가격도 약세였는데, 상황이 더 나빠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운정신도시도 매수문의가 사라졌다.
운정신도시 W공인 대표는 "당장 급매물이 쏟아지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신도시 발표 후 실수요자들도 일단 관망하는 모습"이라며 "간혹 외부에 거주하고 있는 투자수요자들의 걱정스러운 문의전화만 걸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검단신도시도 지난해 말 인천 계양테크노밸리에 이어 이번에 부천장대 등 추가 3기 신도시 건설 계획까지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인천 서구 당하동 '힐스테이트' 전용 85㎡의 경우 지난해 9.13대책 전 3억7000만~3억8000만원이던 매매가가 최근 3억4000만~3억5000만원으로 떨어진 가운데, 실거래가 이뤄지려면 이보다 2000만원 이상 더 낮춰야할 것으로 지역 중개업소에서는 보고 있다.
검단동 H공인 관계자는 "이달부터 새 아파트 분양이 쏟아지면서 '미분양 무덤'이 될 것이라는 우겨가 많은데 누가 집을 사겠느냐"며 "집을 팔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살 사람은 실종됐다"고 말했다.
한편, 연합회 측은 18일 일산에서 집회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연합회 관계자는 "운정, 일산, 검단신도시에서 집회가 끝나면 청와대 앞에서 집회를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