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법인, 중소·사무소 등 제치고 대규모 사업 독차지협회, 배정내역 비공개로 의혹 키워… 불공정·불균형 논란"현재 시스템에서 내역 공개 가능하지만… 논의되지 않아"
  • ▲ 한국감정평가사협회 로고.ⓒ한국감정평가사협회
    ▲ 한국감정평가사협회 로고.ⓒ한국감정평가사협회
    한국감정평가사협회가 외부 의뢰에 감정평가사를 추천하면서 대형감정평가법인(공시전문법인)에 업무를 몰아주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협회는 업무 배정 내역을 내부 회원들한테도 전혀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방식으로 일관하고 있어 불만을 키우고 있다.

    감정평가는 부동산을 비롯한 유·무형자산 등의 경제적 가치를 판정하고 그 결과를 가액으로 표시하는 일이다. 부동산 거래나 경매, 금융권의 담보 대출 전 담보 가치 산정, 공익사업 시행으로 인한 보상, 표준지 공시지가 선정 등에 감정평가를 활용한다. 협회는 국가나 기업·기관 등에서 감정평가 의뢰가 들어왔을 때 평가사를 추천·배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협회에 따르면 추천 방식은 '일반 배정'과 '추가 배정'으로 나뉜다. 일반 배정은 단순 순번제다. 총 4000명에 달하는 전체 평가사에게 순서를 매겨 각자 할당된 몫을 채우면 명단 밑으로 내리고 아직 할당액을 못 채운 경우 위로 올려 우선순위를 주는 식이다. 순번은 평가사별 윤리성 지수, 전문성 지수 등을 참작해 정한다. 추가 배정은 회장 등의 추천을 통해 이뤄진다.

    협회가 평가사를 추천해 주고 받는 수수료(배정액)는 통상 800억 원 규모로 알려졌다. 평가사 인원 수로 나눠 단순 계산하면 평가사 1인당 최소 2000만 원쯤이 배정돼 돌아가는 셈이다. 대규모 사업일수록 평가사가 받는 배정액은 커진다. 예컨대 한 평가사가 1억 원 규모의 감정평가 업무에 추천됐다면 이 중 협회 몫인 6%를 제외한 9400만 원이 평가사가 받는 배정액이 된다.
  • ▲ 한국감정평가사협회 전경.ⓒ한국감정평가사협회
    ▲ 한국감정평가사협회 전경.ⓒ한국감정평가사협회
    문제는 이런 배정 내역이 내부 회원에게조차 전혀 공개되지 않아 대형법인이나 특정인의 독식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일부 평가사는 "대규모 사업을 대형법인들이 독차지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자세한 내역이 공개되지 않아 문제가 공론화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평가사들은 협회에 가입한 평가사의 경우 동일한 자격 조건을 갖춘 인력들로서, 대형법인·중소법인·개인사무소 등의 규모별 차이는 업무를 수주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협회 구성은 대형법인 15여개, 중소법인 80여개, 개인사무소 730여개로 이뤄져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감정평가사는 "신도시 사업 등 규모가 큰 업무들은 모두 대형법인이 싹쓸이하고 있다. 대형법인이 중소법인이나 개인사무소보다 2배 이상 추천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평가사는 "협회 추천의 불균형은 평가사 사이에선 아주 오래 전부터 논의돼 왔던 문제다. 회장 선거 때마다 모든 후보가 이를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내걸 정도"라며 "배정이 공정하게 이뤄지려면 가장 먼저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회에서 규정하는 1인당 배정액 한도도 대형법인은 준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가 정한 평가사 1인당 배정액 한도는 50억 원이다. 200명으로 구성된 법인이라면 총 1조 원의 한도를 갖게 된다. 한도를 넘는 대규모 사업의 경우 초과분에 대해 다른 중소법인이나 개인사무소 등과 컨소시엄을 맺어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배정액 한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대형법인이 업무를 독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평가사들은 이런 문제가 협회 임원진의 구조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협회 임원진은 회장과 부회장, 상근부회장, 상근이사 2명 등 총 5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개인사무소 소속인 상근이사 1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대형법인 소속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평가사 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정평가업자 추천·지정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위원장을 협회 상근부회장이 맡고 있다. 기존에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 교수 등을 초빙해 위원장을 맡겼다. 상근부회장이 위원장 직책을 맡기 시작한 것은 현 양길수 회장이 취임한 직후로 알려졌다. 양 회장은 대형법인 하나감정평가법인 대표 출신이다.

    감정평가사들은 대형법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기 위해 이런 조직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업무 배정 내용을 일체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운영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평가사는 "협회는 감정평가 의뢰에 따라 평가사들을 배정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관련 내역을 내부에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평가사들은 누가 어떤 업무에 배정됐고 예상 배정액은 얼마인지, 각자 배정액 한도를 얼마나 채웠는지 등을 전혀 알 수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협회 내부에서 업무 배정 내역을 공개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미 구축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협회 집행부가 마음만 먹으면 배정 업무를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협회 한 관계자는 "운영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접속 아이디만 있으면 확인할 수 있다. 전 집행부에선 법인 대표나 지회장들에게 접속 아이디를 주고 볼 수 있게 한 것으로 안다"면서 "일부 평가사가 아이디를 모든 구성원에게 줘 투명하게 열람하는 방식을 추진하기도 했었으나 현재는 논의되는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