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첨단 반도체 제재 오히려 자극…SMIC 중심 28나노 이상 반도체 투자 '속도'中, 차량용·가전용 반도체 시장 점령 타깃...2026년까지 26개 팹 건설 추진구형 반도체 중심 中 생산 이어가는 삼성·SK...추가 규제시 脫중국 불가피
  • ▲ SK하이닉스 중국 우시 팹 클린룸 전경 ⓒ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중국 우시 팹 클린룸 전경 ⓒSK하이닉스
    미국이 중국에서 생산하는 28나노미터(nm) 이상 레거시(Legacy, 성숙) 반도체 생산에도 추가적인 제재에 나설지 주목된다. 첨단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 제재에 부딪힌 중국이 레거시 분야에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레거시 반도체까지 제재가 더해지면 중국 현지에 있는 삼성, SK 등 한국 반도체 기업도 사업 철수 말고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1일 반도체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 추가적으로 수출 규제 등을 가하는 전략 구상에 나섰다. 여기에 유럽연합(EU)까지 합세해 28나노 이상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와 소재 등을 중국에 수출하지 않는 방안을 광범위하게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미 지난해 10월 대(對)중국 수출 규제를 시행하며 중국이 자국 내에서 3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데 제동을 걸었다. 첨단 반도체 제조에 들어가는 미국 기술과 장비의 중국 도입을 전면 막은 것이다. 이 규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국은 핵심 장비를 생산하는 일본과 네덜란드도 끌어들여 중국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미국의 이 같은 규제가 오히려 중국 반도체 산업에 불을 지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첨단 반도체 분야에선 장비와 핵심 기술 없인 제조가 불가능하지만 규제 밖에 있는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선 충분히 성장히 가능하다고 판단해 모든 투자와 자원이 레거시 반도체로 몰렸다.

    반도체업계에선 중국이 미국의 제재를 계기로 오히려 더 확실한 '자립'을 목표로 하게 됐다고 말한다. 일본이나 네덜란드 산 반도체 장비 수출길이 막히면 한국 장비업체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모두 빗나갔다. 중국은 자국 장비기업에 더 힘을 실어주면서 외국산에서 완전히 탈피하겠다는 신념을 더 확고히 했다.

    그런 덕에 미국의 규제가 미치지 않는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산업이 성장을 거듭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인 SMIC를 비롯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28나노 이상 레거시 반도체 공장을 짓는데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미국의 규제 이전 대비 반도체 팹(Fab)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혜택이 뒷받침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추세라면 중국은 미국을 훨씬 능가하는 반도체 팹을 보유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오는 2026년까지 중국 내 반도체 팹은 26개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같은 기간 미국에 세워질 공장이 16개라는 전망과 대비된다. 중국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반도체 공장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에 막혀 첨단 반도체 기술을 발전시키기는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레거시 반도체가 전체 반도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공략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나 가전 등에는 28나노 이상의 구형 반도체가 들어가고 이 시장이 전체 반도체 시장의 75%를 차지하는데 이를 중국이 점령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얼마 전 중국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 2인자인 유럽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M)와 손을 잡았다. STM은 중국 기업과 합작으로 법인을 세우고 선전 지역에 운영하고 있는 후공정 공장을 포함해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모두 중국에서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기준 중국은 전기차 등 신생에너지 차량 판매량이 1위인 최대 시장으로, STM은 전기차를 포함한 차량용 반도체를 중국 현지에서 생산해 완성차들에 바로 전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굴기에 미국이 추가 제재에 나서게 되면 가뜩이나 기존 규제로 리스크를 떠안았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또 한번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오히려 앞선 규제보다 삼성과 SK의 중국 생산에 직격탄을 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과 SK가 중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가 대부분 레가시 공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중국 시안 공장에서 전사 낸드 플래시 제품의 40%를 생산하고 있는데 이 중 상당수가 128단 제품이다. SK하이닉스는 우시 팹에서 D램과 낸드를 각각 40%, 20% 담당하고 있는데 D램은 16~17나노, 낸드는 96, 144단 등으로 대부분 구형에 가깝다.

    앞선 제재로 삼성과 SK가 중국 팹을 업그레이드 해 선단 공정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막혔다면 추가적인 규제가 현실화되면 사실상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방안까지 배제하기 힘들다는게 중론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기업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미국과 중국의 관계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미국 측에 관련 애로사항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디리스킹 등의 새로운 전략을 내놓는데 이어 규제 밖이었던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도 중국을 견제할 움직임에 나서는 등 반도체 산업 환경이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고 있어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