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내야 성의 있다고 볼까" … 펀드가 연임 성적표로 둔갑임종룡 회장 '10조 출자'에 업계 '눈치펀드 게임 신호탄' 해석진옥동·빈대인·양종희·김철주도 난처…"많이 내면 악화, 적게 내면 눈밖"포용금융 대신 줄세우기 금융 … CEO '충성 계산기' 전락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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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밀어붙이자 금융사 수장들이 곤혹스러운 시험대에 올랐다. 겉으로는 적극 동참의 미소를 짓지만, 속으로는 '얼마를 내야 할까' 계산기를 두드리며 뜨거운 눈치싸움이 한창이다. 상생·포용이라는 거창한 슬로건 뒤엔 연임을 앞둔 CEO들의 '자리 보전 시험지'가 숨어 있다는 게 금융권 안팎의 공공연한 뒷얘기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빈대인 BNK금융 회장은 내년 3월 말을 기점으로 임기가 끝난다. 이어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은 11월, 김철주 생명보험협회장은 12월 각각 임기가 만료된다. 신한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이하 회추위)는 지난 26일 첫 회의를 열고 차기 대표이사 회장 후보 추천을 위한 경영승계 절차에 들어갔다.

    금융사 수장 인선 레이스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 가운데, 임종룡 회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돌연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자 장사 비판을 수용하겠다"며 5년간 생산적·포용금융에 8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국민성장펀드 출자액만 10조원을 공언하면서 업계에선 '연임 점수를 위한 10조 충성세'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와 관련해서 한 금융권 인사는 "임 회장이 먼저 총대를 멘 건 정부와 코드 맞춘다는 시그널을 확실히 주려는 계산"이라며 "사실상 눈치펀드 게임의 신호탄이었다"고 귀띔했다.

    진옥동 회장의 경우 안정적 경영 성적을 바탕으로 연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지만, 펀드 참여 액수는 최대 변수로 꼽힌다. 그는 최근 이 대통령의 미국 순방길에 동행하고 국민성장펀드 보고대회에 초청받는 등 새 정부와 소통이 원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원하는 수준에 못 미치면 '성의 부족' 꼬리표가 붙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지방금융을 대표하는 빈대인 회장은 더욱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다. 지방은행으로서 재무여력이 제한적이지만, 출자 규모가 적으면 지역금융이 책임을 회피한다는 지적이 뒤따를 게 뻔하다는 것. 업계에선 많이 내면 자본비율이 흔들리고, 적게 내면 정치적 부담이 커진다는 점에서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형국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내년 말 임기가 만료되는 양종희 회장과 김철주 회장도 펀드 참여 부담을 피해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KB금융은 국내 최대 금융지주로서 '책임 있는 규모'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게 작용한다. KB가 어떤 수준의 출자안을 내놓느냐가 다른 금융사 눈치게임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김철주 회장 역시 보험업권의 대표성을 고려할 때 '보험권 몫'을 얼마나 챙겨올지가 관건으로 꼽힌다.

    이에 따라 금융지주는 정부가 성의 있다고 평가하는 펀드의 규모를 놓고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최근 한 금융기관이 천억원대 출자안을 냈다가 당국의 반려를 당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은행마다 슬로건은 상생과 포용인데, 회의실에선 '펀드 참여액 계산기'만 두드린다는 얘기도 돈다. 일각에서는 국민성장펀드가 산업금융이 아니라 연임 점수표로 전락했다고 꼬집는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를 두고 연일 포용·상생을 강조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줄 세우기'라는 냉소가 쏟아진다. 특히 임기를 앞둔 수장들에게는 이 펀드가 곧 자리 보존 시험으로 작동한다는 것. 금융권 한 임원은 "지금 분위기는 펀드 참여가 기업 전략이 아니라 연임 로비의 한 형태처럼 굴러가고 있다"며 "정부가 원하는 건 상생이 아니라 충성 서약 같다"고 잘라 말했다.

    전문가들도 국민성장펀드가 CEO들의 연임 눈치싸움 무대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산업금융 육성보다 정치적 메시지가 앞서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학계 한 교수는 "펀드 참여 여부가 아니라 액수가 '충성의 잣대'로 쓰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펀드가 진짜 성장동력이 되려면) 구체적 성과와 실행력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