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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경제사 전공)가 쓴 '박정희 모델을 다시 본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사흘 뒤 26일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27주기이다. 그의 재임 18년간은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도 경제성장을 기획하고 견인한 이른바 ‘박정희 모델’은 미래의 한국 정치와 경제에 어떠한 역사적 의의로 남는가.
얼마 전에 ‘박정희 모델’은 시효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박물관으로 보내야 된다는 모 교수의 주장이 있었다. ‘박정희 모델’을 대신하여 ‘노무현 패러다임’을 구축하자는 주장도 정부의 모 인사가 제기했다. 그와 유사한 주장은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부터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주장이 이어지니, ‘박정희 모델’에는 무언가 쉽게 폐기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담긴 모양이다.
다소 추상 수준을 높여 박 대통령과 그의 정부를 지배한 행동원리를 요약하면 다음의 4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철저한 실용주의이다. 박 대통령에게 모든 이론은 회색이었다. 그가 잘 훈련된 경제학자였다면 결코 ‘수출 주도 공업화’라는 한 시대를 구원한 위대한 전략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주류 경제학은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1963년부터 특별한 지원도 없었는데 합판이나 섬유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인근 일본이 중화학공업화를 달성하자 경공업 부분의 비교 우위가 슬그머니 한반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거기서 가능성의 조짐을 발견했으며, 확신이 서자 먹이를 쫓는 표범처럼 맹진했다.
고도성장 견인한 4가지 원칙
둘째는 조정과 합의이다. 흔히들 그가 독재를 하였다지만, 합의와 조정의 시스템을 독재했을 뿐이다. 제도화된 시스템의 상징이 1965년부터 매달 이어진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보고이다. 그는 두 회의를 14년간 거의 빼먹지 않았다. 두 회의를 통해 수도승처럼 묵묵히 경제를 익혔으며, 때로는 매서운 선생으로 돌변해 학생을 질타했다. 조정과 합의를 거친 다음의 이견이나 불평은 그의 정부에서 없었다. 요사이 국가의 명운을 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진행 중인데, 여당에서 심지어 대통령특보를 지낸 사람이 공공연히 반대를 하고 있다. 부도나기 직전의 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엇박자는 박 대통령 때의 정부와는 절대 무관했다.
셋째는 선택과 집중이다. 지나친 단순화이겠지만 그가 추구한 일은 수출 진흥과 새마을운동 2가지 뿐이다. 그의 정부는 2가지를 위해 잘 훈련된 군대와 같이 조직이 간편했고 기동이 민활했으며 집행이 강력했다. 요사이는 모든 것이 거꾸로인 듯하다. 정부 조직을 보면 무려 257개 특별법에 기초한 537개의 정부 계획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면서 얽힌 가운데, 500여 개의 공사 공기업 사업자단체 연구소 등의 산하 단체가 방만하게 운영되는 특별회계와 기금 위에서 각자의 밥그릇을 챙기고 있다.
넷째는 공명과 강직이다. 재임 18년간 그는 사(私)를 추구한 적이 없다. 빈털터리로 떠났다. 이 점은 동시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에서 비슷한 예가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탁월한 정치적 덕목이다. 천하의 재재다사(才才多士)가 그의 정부에 모여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덕분인가. 농촌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담장을 허물고 농로를 넓히면서 조그마한 공(公)의 사회를 발견하였던 것도 다름 아니라 위에서 커다란 공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허한 비판보다 장점 배워야
‘박정희 모델’은 이와 같은 원리와 덕목으로 구축됐다. 모든 위대한 리더십이 다 그러했다. 8억 명의 인민을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낸 덩샤오핑이 그러했고, 영국병으로 시들어가는 나라를 소생시킨 마거릿 대처가 그러했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도시국가를 건설한 리콴유가 그러했다. 그렇게 한 시대를 구원한 리더십이 1960, 70년대의 한국에서 운 좋게 출현했을 뿐이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는 이제 버릇과도 같은 비판은 그만 접고 그분을 공부하고 깨우칠 필요가 있다. 그의 27주기에 나라가 더없이 혼탁하다. 혼령이시여, 이 말 많고 고집 세고 어리석은 민족을 굽어 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