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承晩, 朴正熙가 과연 독재자인가?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세기의 유럽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었다.
    링컨이 1950~70년대의 한국을 다스려도 李, 朴 대통령만큼 하진 못하였을 것이다. 
    趙甲濟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을 기술하면서 '역사성'을 빼버렸다. 그래서 역사 교과서가 아니고 선전물 같은 책이 되고 말았다. 역사성이란 시간의 흐름이다. 西歐(서구)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기복과 進退(진퇴)가 있었고 한국은 그 과정을 어떻게 밟았느냐를 설명해야 역사를 알게 된다. 1948년 8월15일부터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한 나라에서 과연 수백년이 걸린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었느냐를 학생들에게 설명한 다음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를 비판해야 한다. 교과서 筆陣(필진)은 그런 역사성을 생략한 채 李承晩, 朴正熙 정부에 대하여는 서구식 민주주의 기준을 적용, 독재라고 비판하고 북한정권에 대하여는 북한식 기준을 적용, 비호한다. 李承晩,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호칭하는 것은 反(반)역사적이란 사실을 아래에 설명한다. 
     
       서기 1215년 영국의 존 왕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귀족회의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물리지 않고 법원의 구속영장 없이는 자유민을 구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약속을 했다. 마그나 카르타(大章典, 대장전)의 탄생이다. 그 후 국회와 王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內戰(내전), 암살, 처형 등으로 피를 흘리다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王의 권한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국회가 국민을 대표하여 主權(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세계 민주주의 발달의 최선진국 영국에서도 1754년에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당시 인구 약 800만 명의 3.5%인 28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물론 귀족들이었다. 차츰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1884년에 가면 세금을 내는 영국의 모든 家口主(가구주)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1918년엔 세금을 내는가의 與否(여부)와 관계 없이 모든 成人(성인) 남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들에 대한 보통 선거권은 1928년에 주어졌다.
     
      프랑스에서도 1790년 일정규모의 재산을 가진 납세자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1815년엔 30세 이상의 年300 프랑 이상 납세자가 투표권을 가졌다. 1820년엔 일정 재산 이상을 가진 有權者(유권자)는 1인 두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엔 25세 이상의 年200프랑 이상 납세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인구는 전체 成人의 170분의 1이었다. 1848년 모든 남자 成人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가 2년 뒤 3년 이상 거주 납세자로 제한되었다. 1851년에 다시 남자보통선거권으로 돌아갔다. 1945년에 모든 여성 성인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안심하고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1964년 民權法(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이 통과된 이후였다. 흑인의 경우 한국보다 정치적 자유를 맛보는 것이 늦었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거권 확대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폭이 확대되는 과정이란 사실이다. 동시에 선거권 확대는 점진적이었고 신분중심(봉건체제)-납세중심(부르조아 체제)-男女 모두(대중 민주주의 시대)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투표권의 확대는 法 개정을 통하여 이뤄졌다. 法治(법치)의 확립과정이 민주주의 발달 과정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수백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1948년 헌법 제정과 동시에 보통선거를 하게 되었다. 재벌 총수도 한 표, 직원도 한 표이다. 無職者(무식자)도 한 표, 교수도 한 표이다. 세금을 수백억원 내는 사람도 한 표, 안 내는 사람도 한 표이다.
     
      유럽에서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 과정은 투쟁의 과정이고 민주주의 학습과 실천의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그 결과물로서의 男女 불문한 1인1표제를 도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서양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민주주의 제도에 무임승차한 셈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럽 민주주의 국가 사람들의 苦鬪(고투)를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진 셈이다.
     
      1948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서양에서 수백년 걸려[영국의 경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부터 시작하면 보통선거 쟁취까지 약 800년이 걸렸다] 발전시킨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우리는 민주주의란 연극, 민주주의란 연습을 해온 셈이다. 연극과 연습을 많이 하면 實演(실연)이 되긴 하지만 외래 제도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선 엄청난 代價(대가)를 치러야 한다.
     
      西歐의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李承晩과 朴正熙를 독재자라고만 단정하는 것은, 메이저 리그의 통계를 기준으로 삼아 동네 야구 선수들을 혹평하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에게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설을 퍼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의 先進(선진) 민주주의를 판단기준으로 하여 李承晩, 朴正熙가 독재를 했다고 주장하고싶은 사람은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 10~30년만에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를 성취한 나라를 발견해야 한다. 세계사에는 물론 그런 예가 없다.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세기의 유럽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었다. 10~30년짜리 한국 민주주의가 유럽의 수백 년짜리 민주주의보다 더 발전되었다면 두 전직 대통령을 과연 자신 있게 독재자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링컨이 1950~1970년대의 한국을 다스려도 李, 朴 대통령만큼 하진 못하였을 것이다.
     
      일본에 비교하면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10~1920년대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보다 못하지 않다. 북한과 중국은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으로 좌익들은 李承晩,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진 기준은 地上(지상)의 것이 아니라 天國(천국)의 기준이든지 자기 꿈속의 기준일 것이다. 그들의 잣대는 북한정권에 들이댈 때는 갑자기 눈금이 넓어지는 요술 자(尺)이기도 하다.
     
      李承晩은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적이 없고,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적이 없다. 그를 독재자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자진하여 물러난 점에서도 그렇다. 朴正熙는 물론 두 번(5·16과 유신) 쿠데타를 하였다. 그러나 1963, 1967, 1971년 세 차례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이 기간은 독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독재적 기간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통치기간 전체를 독재로 모는 방식의 표현(독재자 운운)은 잘못 된 것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당위성을 부정한 적도 없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후진국에, 그것도 전쟁 중인 나라에 무조건 적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민주주의의 조건을 먼저 만들겠다고 작심한 사람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제도를 만든 점에서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로 보는 게 타당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