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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이승만포럼] 2012. 12. 13(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고독한 일신교적 예언자(預言者) 이승만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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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序言)
거인 이승만(李承晩)은 아직도 그가 세운 나라의 국민대중의 이해 속에 있지 못하다.
심지어는 이승만 연구의 제일급으로 꼽아지는 학자들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정평 있다는 연구서인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의 저자 이정식이 1985년에 영문으로 출간한『전후일한관계사』(1989 小此木政夫, 古田博司, 日譯)에 드러나 있는 그의 이승만관(觀) 같은 것이다.
이 책의 제 2장의 제목은「감정의 충돌-일본과 이승만」으로 되어있다. 이 속에서 이정식 교수는「1945년으로 부터 1960년 사이에 일본인과 한국인 간에는 감정적 충돌이 보였다」고 했다. 미국 측이 주로 냉전전선 구축의 필요로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수립을 위해 주선했던 한일 회담은 6.25 전쟁 중에 시작되어 이승만 정권이 끝나는 60년까지 몇 번에 걸쳐 개최와 교착을 되풀이 했으나 타결을 보지 못한 회담이었다.
회담에서 한국 측은 1905년에서 1945년까지의 과거사에 대해 일관되게 일본이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의 자세를 이정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본인은 일본의 조선통치는 서양의 침략에서 몸을 지키기 위한 일본의-실제로는 황색인종의-필요가 명령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그 나라(한국-필자주)를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은 스스로의 행위를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조선을 위해」치른 노력에 대해, 한국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이교수는 한국의 사죄요구에 대해, 일본이 거부한 입장을 대치시키면서, 일본의 사죄거부에 대한 변명논리를 함축한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한·일간에 균형을 취하는 외양을 갖췄는데, 실질은 일본으로 기울어진 시각을 이교수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일본의 변명논리란, 일본을 맹주로 하는「대아시아주의」,「아시아해방전쟁론」,「식민지 근대화론」등으로 80년대 중반쯤에는 이미 논진(論盡)된 주장들이었음이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논리들이 일본의 근대 그 자체인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은폐하기 위한 주장인 것은 굳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정식 교수는 이때의 한·일양국의「감정적 대립」은 상호이해와 화해를 어렵게 했을 뿐 아니라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하나의 전형적인 경우라고 그려놓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난 교섭의 장에서 관계복원을 위해 주고받은 초기 수작을「감정대립」이라는 동일평면으로 대패질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윤리적 기동력에 힘을 실어주는 열정을「감정대립」의 감정으로만 알아서는 관계사안의 콘텍스트조차 붙들기 어려울 것이다.
한일 간「감정대립」에서 일방의 극에 이교수가 세워 놓은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당시 한일교섭을 관찰하는 자의 대부분, 특히 구미의 관찰자는 이승만대통령의 맹렬한 반일태도에 충돌의 원인을 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강한 증오를 느꼈으며, 그의 태도가 한일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교수가 이승만을 이성적 사고와 거리가 먼 감정인간으로 그리는데 동원한 말들을 주워본다.「이승만의 내셔널리즘」,「싸움쟁이」,「서양의 교육과 미국서의 긴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유교적 지식인의 권화」,「대화와 화해와는 거리가 먼 이승만」,「제로 썸 게임의 대결에 절어든 인간」등이다.
이 교수는 결론처럼 얘기한다.『이승만의 성격이 명확하게 한일대립의 장기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이 교수는 한일회담을 지켜본 미국 측의 주장을 동원하여, 스스로의 결론에 객관성을 부여하려고도 한다. 당시의 주일본 미국대사 존 애리슨의 말이다.
『이승만의 선동하에, 한국은 가장 비 타협적인 방침을 채용했다. 동경에 있는 우리들 대부분의 의견으로는 그들은 결단코 합리적이 아니다.』
이정식 교수가 그려놓은 이승만의 성격은「감정적이고, 이성적 사고와는 거리가 있고, 이웃과의 화해를 싫어하고, 다툼을 좋아하고,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였다.
이정식 교수는 결국 한일회담을 두고 양국갈등에서 일본 측에 도리가 있다는 미국 측의 판정을 수용하여 일본 손을 들어주는 모양을 취한 것이다.
『한일분쟁의 성격으로 보아, 실무적인 미국인들이, 당면한 현안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일본 측이 한국보다 합리적이라고 보았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
이교수의 문제설정과는 별개로 한일수교회담에서의 양국갈등의 성격을 바로 알기위해, 한일 간의 제일 첫 만남인 51년 10월 20일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들어본다.
장소는 동경의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외교국 회의실, 시볼드 외교국장이 옵써버로 참가했다. 먼저 시볼드의 회담개최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서 일본 측 수석대표 이구치(井口貞未)외무차관의 모두 발언, 이어서 일본말을 모르고 영어가 유창한 양유찬 수석대표(주미대사)의 발언이 있었다. 연설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타이프를 쳐서 작성한 원고를 읽는 것이었다. 이 속에 “이제 우리 화해하자” (Let us bury the hatchet)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연설을 다 듣고 나서, 일본 측의 교체 수석대표 치바(千葉히로시)는「화해란 무엇인가」라면서「당신들과 우리들은 다툰 적은 없으니까, 원한이 있을 리 없는 것 아니냐」고 반론하고 나왔다. 대표였던 유진오는 일본 측이「시치미 떼는 태도를 취했다」고 뒷날 회상했다.
한국 사람들한테는 일본한테 당한 국가탈취와 식민지배가, 압도적인 리얼리티였던데 반해, 일본 측은 어떠한 죄의식이나 반성도 없이 수교회담에 임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사죄에 의한 과거청산요구와 일본측의 회피거부는 1965년, 청구권 등 물적 수수관계의 확정으로 회담이 타결되면서도 그대로다. 그 같은 양국관계의 본질은 오늘도 그대로다.
2차대전의 패전으로 그 혼이 미국에 종속되어버린 일본이 윤리적 자립을 하지 못해, 역사청산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국익을 두고 미국에 대어드는 이승만의 감정과 고집에서 한일갈등의 근인(根因)을 찾으려 하는 것은 너무도 한심하다 할 수 밖에 없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에 살면, 웬만한 사회는 모두 미국적인 가치관에 선전의 고지를 내어주게 되고, 지식인일수록 미국적인 가치관과 시각을 의식도 못하고, 스스로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살게 되고 마는 것 같다.
세계경제 10위권에 도달한 대한민국이란 우람한 소년의 쉼 없는 전진과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년을 있게 한 국부(國父) 이승만의 실천적 행에서, 소년의 오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를 통해서만 소년의 내일을 향해, 영감과 바른 전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감정콘트롤이 어려운, 이성적 판단이 서툰, 다툼을 좋아하는, 화해할 줄 모르는, 외고집의 독단, 독재성」으로 알고 있는 이승만의 성격 규정을 더 이상 방치하는 게으름에서 벗어날 때가 우리 모두 위에 닥쳐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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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소수자의 응전 -
토인비적인 거시 문명사관으로 말하자면 19세기 후반 조선문명은 쇠퇴와 해체과정을 밟고 있었다.
아놀드 토인비의『역사의 연구』는 역사를 보는 안목에 관한 지혜의 보고로 느껴진다. 이 책의 제 20장「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의 제1절의 제목은「구세주로서의 창조적 천재」이다. 여기서 토인비는 역사를 추동하는 「활동의 원천이 사회 그 자체인 경우는 절대로 없고, 어디까지나 원천은 개인이라는 것, 그리고 창조적 행위가 되는 경우의 활동은 늘 어떤 의미에서건 초인간적 천재인 인간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상승기건 하강기건 토인비는 언제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의 역사창성력을 챙긴다.『성장에서 해체로 변화했다고, 창조력의 불이 완전히 꺼지고 마는 것은 아니다. 변함없이 창조적 인물은 출현하는 것이고, 그 창조력으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지만, 다만 그들은 이제는 전혀 새로운 입장에 서서, 그 새로운 입장으로부터 그들의 창조적 사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토인비는 성장기냐 해체기냐에 따라 창조적 개인에게 요청되는 역할을 확연히 갈라놓고 있다.
『성장기의 문명에 있어서는, 창조자는 도전에 대해 승리의 응전으로서 답하는 정복자의 역할을 행하도록 요구되지만, 해체기의 문명에 있어서는, 도전이 더 이상 창조적이지 못한 소수자를 패퇴시켰기 때문에, 응전해내지 못한 사회를 구제하는 구세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창조적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토인비의 소론을 따르면, 조선문명이 해체해 들어가던 구한말의 역사상황에서, 한국이라고 응전에 실패한 사회를 구제하려는「창조적 개인」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구한말 상황에서 역사 추동력을 추구하는「창조적 개인」의 씨앗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과거보는 장중에 방방곡곡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근정전 앞마당의 현제판(懸題板) 앞에 엎드린 무리 속에 있을까. 아니면 덕수궁 대한문 앞 보부상 떼거리의 몽둥이 다짐에 폭풍속의 낙엽처럼 쫓겨 간 만민공동회의 달리는 젊은이들 속에 있을 것인가.
우리가 관심하는 구한말의 한 청년 이승만은 이때에 만민공동회(독립협회가 주도하는 군중집회)의 앞줄에 서는 한 사람의 선동연설가였다. 어찌하면 이때의 청년 이승만한테서 토인비의「창조적 개인」의 씨앗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역사상에서 이승만이 수행했던 역할과 토인비가 말하는 「응전에 실패한 사회를 구제하는 구세주의 역할」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큰 관심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개의 전쟁과 정체성 위기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만 20살인 1895년 4월 2일(『이승만과 그의시대』, 이주영. 9.16)이었다. 이 무렵, 그 전해 7월에 발발했던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 되고 있었다.
3월 20일 시모노세끼(下関)에서 개시 되었던 청일간의 강화담판은 3월 30일 타결되어, 4월 17일 조인되었다. 이내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청일 간 조약에 간섭 일본이 차지하려던 요동반도를 중국에 도로 돌려주도록 권고하고 나왔다. 일본은 즉각 응했고, 환부를 선언한 것은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한지 한 달 남짓한 5월 10일이었다. 서울 하늘에 러시아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
한반도에 역사 있고서 처음으로 덮친 근대 전쟁의 충격이 이승만의 눈을 서양으로 돌리게 했다.
청일전쟁이 배재학당 입학계기로 작용했음을 유영익은 지적하고 있다.
『1894년에 터진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당공부를 중지하고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이승만의 삶과 꿈』P.22) 그러나 이를 청년 이승만이 전쟁으로 인한 정치정세의 지각변동의 감지에 재빨랐던 결과로만 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배재학당 입학을 전후하여 청년 이승만은 심각한 정체성위기(identity crisis)속에 있었던 것 같다.
정체성위기는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의 조어(造語)이지만, 이제는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역사학 분야에 공유되어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스로의 삶의 고유성으로 느끼는 어떤 것이,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내적 일관성과 지속성을 느끼게 하면, 정체성(identity)감은 확실한 것이고, 내적 일관성을 느끼기 어렵게 되면 정체성 위기 속에 놓이게 된다. 청년기는 흔히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되는데 한 인격이 두 문명의 조우에 부딪히거나, 격변하는 시대상황을 통과할 때(한말상황은 이 모두를 포괄한다) 의미를 갖고 살려는 인간일수록, 격렬한 아픔으로 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체성 위기 속에 있는 청년은 삶의 목표추구에 대한 열정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기완성, 자아실현을 향한 전망을 세우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되어있다.
에릭슨은 하나의 청년은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면서 그 혼은 성장한다고 한다.
에릭슨은『청년 루터』에서, 말틴 루터가 聖과 俗에 걸쳐 중세의 하늘을 덮었던 절대의 권위를 그대로 이은 로마 교황에 도전하여,「이단의 개조(開祖)」가 되고, 예수가 일신교인 유대교의 전통에 개혁을 가하여 기독교를 있게 했듯이, 가톨릭의 전통을 개혁하여 개신교가 등장하게 했다 하고서, 이 위대한 개혁혼의 기초는 루터 21살부터 33살까지의 12년간의 청년기에 그가 겪은 몇 번의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를 극복해 냄으로써 확립된 것이라 하고 있다. 21살의 루터는 법조 경력을 쌓아가던 우수한 학생이다가 생각지도 않게 들판에서 벼락을 맞고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했었고, 33살 때에는 빗텐벨크성의 교회문짝에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못질했던 것이다.
청년 이승만은 청일전쟁이 나던 해 여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되고서 다음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까지 사이에 정체성위기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정주의 『우남 이승만 전』에는 이를 알게 하는 서술이 있다. 서정주의 전기는 우남의 직접 구술에 의존한 것이므로 비록 50여년이 지나 회상조에 의한 기억일지라도 드물게 우남 젊은 날의 정신의 편력의 결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관련 대목을 들어 본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서 우남의 부자간에 있은 대화다. “그래 어찌할 작정이냐?” 아들은 “…” 『갑오년 여름 과거법을 폐한다는 조서가 내린 뒤로, 부자가 조용히 얼굴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묻는 아버지의 질문이요, 아들의 침묵이었으나, 그들에겐 역시 별다른 방책이 손쉽게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미 육순이 넘은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까맣게 절망을 하고, 아들은 또 아들대로 수그러진 머리를 치켜들 수 없는 채, 우울하고 가난한 나날이 겹쳐갈 뿐이었다.』
청일전쟁은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조선침략전쟁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명치일본이 그들의 근대화의 도달점을 서양에 선전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일본근대화의 국민교사 후쿠자와(福沢諭吉)는 이 전쟁을「문야(文野)의 투쟁」즉「문명과 야만」의 투쟁이라고 했다.
500년 왕조를 덮친 근대침략전쟁만큼 강렬한 외래문명의 충격은 없을 터이지만, 감수성이 풍부했던 청년 이승만의 심상에 일어났을 파문을 직접 알게 하는 기록은 안 보인다.
다만 청일전쟁에 계기하는 갑오경장이 과거폐지를 통해, 청년 이승만의 단하나의 입신의 길을 닫아 버림으로써, 삶의 전망을 흔들어 버렸고, 이로 말미암은 정체성 위기로서 전쟁은 이승만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미당의 전기는 1894년 늦가을 어느 밤, 갈 바를 몰라 하는 아들을 앉혀놓고, 우남의 아버지가 한 말을 들어본다.
“흥! 미친놈들! 조상이 천년을 하루같이 지켜오던 성현의 길을 폐지하고, 그러고도 그놈들이 벌을 받지 않을까? 인재를 골라서 쓰지 않는다면 어느 개새끼라도 마구 갖다 쓸 작정인가! 무렴(無廉)한 왜놈들! 무렴한 개화당 놈들! 그놈들 때문에 인제 나라는 망하고 마느니라! 인제 두고 보아라!” -
한말(韓末), 조선문명이 서양문명과 조우했을 때, 주지하는 바, 거기에 응전한 조선의 혼은 위정척사와 개화로 분열했다. 우남의 아버지는 위정척사 쪽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이 나기까지, 10년간 과거응시를 위해 서당에서 유학을 익혔던 것이 학문의 전부였고, 그 수학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착해 든 투철한 효(孝)의 질서관은, 전쟁이 나기까지 우남의 혼을 당연히 위정척사 쪽에 두었다 할 것이다.
그해 겨울쯤, 서당 친구 신긍우(신흥우의 형)가 찾아와 이승만에게 배재학당 입학을 권하면서 한 얘기 중에는 다음 같은 말이 있다. “자네도 대강은 짐작하겠지만 때는 벌써 뒤바뀌어 가고 있네. 두말할 것도 없이 유학이나 닦아 과거나 보던 때는 지나고, 인제는 개화천지가 되어 가고 있단 말일세. 그만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온지 알겠지? 주저하지 말고 자네도 우리하고 같이 개화를 배우세. 일본말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산학(算學)도 배우고, 세상 돌아가는 도리도 알아보잔 말이야. 어쩔 텐가, …케케묵은 과거나 볼 생각 인제는 되지도 않을 것이니 그만 집어 치우고…”
이승만이 가로 채고 나왔다.
“아따, 자네 말주변이 꽤 늘었네 그려. 그것 모두 다 현채라는 사람한테 배웠나? 과거야 하든 안하든 십년을 학문을 닦았으면 그만한 건 가질 줄 알아야지. 자넨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유자(儒者)가 아니고 천주학쟁이고 또 왜놈의 사환인가? 실없는 사람 같으니! 그런 소릴 하려면 아예 두 번 다시 우리 집에 오지 말게!”
여기서「과거야 하든 안하든 십년을 학문을 닦았으면 그만한 건 가질 줄 알아야지」는 주목을 요한다. 이승만에게는 – 막스 베버의 말대로 다신교이긴 하나 고도로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는 윤리체계로서의 – 유교 아이덴티티가 탄탄하게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갖다 안긴 신문명의 충격은 이승만을 고통스런 정체성위기에 빠져 들게 했던 것이다.
에릭슨은『루터의「아이덴티티 위기」는 무섭게 이데올로기의 변화의 계기에 불을 붙였다』고 하고 있다.
이승만도 그랬다. 그는 개화 이데올로기로 건너뛰었고, 하루걸러 찾아온 신긍우의 발길이 두 달쯤 지났을 때, 입학 권유를 받아들이고 만다.
앞에서 개화와 신학문 공부를 두고서, 각각 서로 다른 우남의 아버지, 우남, 신긍우의 입장개진을 보았지만, 이 모든 주장은 그대로 아이덴티티 위기를 통과하고 있는 이승만 내면의 정체성 동요와 갈등상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는 모두 50여년이 지난 이승만의 회상 속의 기억이니까.
흔히 이승만 사상을 거론하면서, 그 출발에 정면의 유자(儒者) 아이덴티티가 있었음을 흘리고서 과거보느라 서당공부 좀 했다는 정도로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한성감옥에서의 회심으로 개오하게 된 복음주의 신앙이 주는 영적파워로, 위정척사와 개화를, 나아가서는 동적 문명과 서적 문명을 고차적으로 한 인격 속에서 통합해내는 혼의 진화를 이승만은 달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 위에 드러낸 위대성의 평범한 출발점에 유자(儒者) 아이덴티티가 있었음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정체성 위기 -
역사위에 드러나 있는 이승만의 위대성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한말에는 보부상 패거리의 몽둥이 바람에 쫓기는 일개「운동권」청년일 뿐이었다.
이「운동권」청년 속에 있을 토인비의「창조적 개인」이 얼굴을 내밀 전기(轉機)는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수감되면서 다가왔다. 이승만은 고종을 폐위코자했던 박영효 일당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던 이유로 1899년 1월 투옥되었다. (『젊은날의 이승만』 유영익, p.145)
1899년 1월 9일 체포되어 1월 30일 동료 두 명과 함께 권총을 들고 탈옥하다가 그날 중에 실패하고 재수감된다. 잔혹한 고문이 기다렸다. 손목에는 수갑 다리에는 족쇄, 그리고 목에는 10kg의 칼을 쓰고 재판을 받은 7월까지 약 6개월간 미결감에 갇혔다. 이 동안에 이른바 회심 현상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그의 영문 자필 「투옥경위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유영익 상기서 p.60)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선교학교에 다닐 때에는 그 책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나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선교학교에서 어느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고 있던 증오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방에서 칼을 쓰고 성경을 읽던 중 처음으로 기도를 했는데 신비체험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24살의 청년 이승만은 변한 사람이 되었다고 뒷날 스스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 고백에서 인지해 보인 변화는 배재학당 이래 많은 것을 배우고, 도움을 받던 선교사들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순간에 사라졌다는 것 정도이다. 변화의 질과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느 성경 구절을 읽다가 그 같은 체험이 있었던 지를 아는 게 도움이 될 텐데 지적이 없다.
기독교사에 있는 유사한 체험에서 시사 받고자 한다.
배재학당의 학당장인 헨리 아펜젤러는 청년 이승만의 숨어있는 카리스마를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이승만에게 서양문명에 대한 눈을 열어 주었고, 기독교 신앙을 전했고, 감옥 뒷바라지를 했고, 가족의 생계까지 챙기는 등, 이승만을 지극히 아꼈다.
이 아펜젤러는 감리교(Methodism) 목사였다. 이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회심체험에 이승만의 체험은 닮아있다. 여기에 주목한 것은 배재 졸업생이면서 감리교 목사인 김낙환이다. (『우남 이승만 신앙연구』, 청미디어) -
회심체험이 드러나는 웨슬리의 유명한 1738년 일기(5월24일)를 옮겨본다.
『저녁에 나는 올더스 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참석했다. 그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의 서문’ 을 읽고 있었다. 오후 9시 15분 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내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나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가져가 주고 죄의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존 웨슬리의 일기』, 김영운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이 체험기는 웨슬리의 회심체험이 선행 등의 행(行)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 즉 복음주의차원의 사건이고 종교개혁을 한 루터의 회심체험에 닮았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敎의 역사』, 小田垣也, 講談社 참고)
루터의 회심체험은 먼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구제론(救濟論)적인 것이었다. 23살 법학학사에서 다음단계로 나아가려던 어느 날 집에 다녀오다가 들판에서 폭풍우 속에 벼락을 만나 땅에 엎드렸다.「살려주면 수도승이 되겠다」고 기도했다. 중세말기인 그때에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현실에 살아있었고, 역사에 유명한 페스트가 기승을 부려, 죽음과 지옥에 대한 공포가 일상적이었다 한다.
기독교사가들은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리의 신학도 구제론적 지향이라고 하고 있다. 웨슬리가 활동한 18세기는 영국의 산업혁명기였다. 도시 저변에 프롤레타리아와 상층계급간의 빈부격차는 격렬해지고, 완충장치는 아직이었으니, 부도덕과 사회불안이 차고 넘쳤다. 때는 바야흐로 인간이 이성을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 인문주의적 합리주의가 신학 등 사상계를 풍미했지만, 웨슬리가 귀착한데는 초합리주의적인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이승만이 놓였던, 해체기에 들어간 한말의 역사상황과 종류는 달라도 한번 유추해 볼 일이다. -
말틴 루터의 회심체험은 들판에서의 벼락, 성가대 석에서의 발작 등으로 몇 번에 나눠져 있는데, 그 완결판이 「탑에서의 회심」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원에서 인간으로서 견뎌 낼 수 있는 극한의 수업을 치른 결과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는 신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확신에 도달하면서「의인(義人)은 행(行)에 의해서가 아니고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니라」(로마서 1:17)에 눈뜨고, 신앙의인(信仰義人)에 귀착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회심체험을 유학생활 중에 생각날 때 마다 적어서인지 몇 갈래로 나와 있다.
구제론적인 복음주의 신앙으로 방향 잡힌 것을 알게 하는 기술도 있다.
『이 이야기의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 데 있다. 어두운 감방 안에서 일부 죄수들은 죽음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기다리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교수대로 끌려갔고, 또 다른 이들은 마치 사탄 자신이 영원히 옥좌에서 군림하고 있는 듯 희망의 빛줄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끝없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런 시간과 그런 상황에서 우리 각자는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고 믿었고, 예수가 당한 무고와 불의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참된 것이어서 우리 각자가 이상스럽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우남 이승만신앙연구』p. 112,「이승만의 비망록」에서)
이승만이 회심으로 도달한 신앙이 복음주의 차원임을 확인하면서, 복음주의 신앙의 원조인 사도 바울의 회심과정을 본다.
주지하는바 바울은 유대교의 한 분파에 그칠 수도 있는 기독교를 세계적 보편종교에의 길을 연 사도이다.
신약성경의 절반 정도는 바울이 쓴 편지이다.
예수의 언행에 함축된 논리를 끄집어내어, 의미부여를 하여 교의를 구축한 것은 바울이라고 한다. 바울 없이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고도 한다. -
바울은 탈소스라는 소아시아의 도시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자라, 그리스어가 유창했고 로마시민권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총명하고 열성적인 유대교인으로 바리새파의 행동대장역이었다. 신흥세력인 기독교인은 보는 족족 잡아다가 심문하고 탄압했다.
그러던 어느 때 바울은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돌연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만다.「사울아!」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말에서 굴러 떨어진다. 잠시 있다가 시력을 회복한 바울은 세례를 받았고, 나머지 인생을 복음을 전하는 선교여행에 바쳤다.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순교했다.
바울신앙의 핵심은「신앙의인(義人)」이라 하는데, 그 표준 장절이「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은 율법의 행(行)에 의함이 아니고 신앙에 의해서다」(로마서 3:28)이다.
이 복음주의적 신앙의 기본적 입장이 바울에서 시작하여 루터를 거쳐 웨슬리에 이어지고 아펜젤러를 통해 한성감옥의 청년 이승만에게 가 있음을 확인해 두고자 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우세한 외래 문명이 약소 문명을 침공했을 때 약자의 혼은 곧 잘 전통주의와 타협주의 사이에서 분열하지만, 그 양자를 초월하여 바울 같은 복음주의가 상쟁하는 양 문명의 정신적 부를 통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창성해 냈다 하고 있다. 이는『역사의 연구』제33장 2절속의「혼의 응전」에 보이는 통찰이다.
우리는 이승만의 한성감옥 이후의 사상적 변모를 알아보는데 있어서 토인비의 복음주의적 접근법을 원용하고자 한다. 이승만은 그가 회심으로 도달한 복음주의로 시대의 고뇌에 어떻게 응전했던가를 보는 것이다.
아시아의 근대와 기독교
일본은 지금 하산(下山)기에 접어들었다고 그들 스스로 일부에 자각이 있어서 인지, 근년에 와서 부쩍 그들의 근대를 되돌아보는 노력이 지식계에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아주 눈을 끄는 것이 기독교를 좀 더 정면에서 일본사람들에게 이해시켜 보려는 시도이다 (『불가사의한 기독교』, 橋爪大三郞, 大澤眞幸, 講談社). 이 저자들의 입론의 출발은,「근대」란「서양적 사회」가 세계적으로 표준이 되어버린 상황을 말하고, 이「서양」이란 것의 문명적 아이덴티티의 중핵에 있는 것이 기독교라는 인식이다. 맞는 얘기다.
근대화를「서양으로부터 기독교에 유래하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나 제도나 사물의 사고방식을 서양 밖에 있는 자들이 받아들여 온 과정」으로 인식해 보인 이 사회학자들은, 근대화의 이 같은 본질이 일본인들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유는 어느 정도 근대화되어 있는 세계의 각 나라들 중에서「기독교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정도」가 일본이 제일 높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기독교라는 것을 거의 이해 못한 채로 근대화해 온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이제사 감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예언자(預言者)와 일신교
한국 기독교의 도달점을 알려주는 하나의 예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1897-1944)가 있다. 창원 웅천 사람으로 오산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직 목사로서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1935년 5월 금강산 온정리에서 장로교 목사들을 앞에 하여「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 -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대가 망하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 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실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시대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침례인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치자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침례인 요한은 물론 일사(一死)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왜 못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가 되어 떨고만 있는 것인가… (중단됨) (인터넷.구글,「주기철목사」에서)
우리가 관심 갖는 예언자(預言者)는 위의 설교제목의 예언자 바로 그것이고, 설교속의「선지자」는 예언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설교에는 예언자가 뭐하는 사람인지 그 역할의 일단이 드러나 있다.
참고로 일본 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를 첨언해 두겠다. 1939년 선교사도 와있던 일본 기독교의 여러 교파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에 따라, 전부 하나의 조직 속에 합동하기로 하고, 1941년에는 일본 기독교단을 결성했다. 다음해에 이 조직의 총대표인 통리(通理)라는 자가 일본 신토(神道)의 우두머리 본산인 이세(伊勢) 신궁에 참배하고 교단 결성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 보고 했다한다.『기독교의 역사』). -
일신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예언자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최대의 사회과학자란 소리를 듣는 독일의 막스 베버에게 종교사회학의 명저『고대 유대교』가 있다. 베버의 중심주제는 예언자들이 어떻게 역할 하여 국가가 패전하고 멸망하였는데도, 이스라엘의 민족적 아이덴티티가 디아스포라 상태에서도 유지될 수 있게 유대교가 작용토록 하였는가 이다. 베버의 소론에 따라 일신교와 예언자를 알아볼 것이고, 이승만의 무엇이 예언자에 일치하는 가를 힘자라는 대로 알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