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지지로 돌아선 중국의 장개석

  • ▲ 중국 국민당정부 장개석 총통. 상해임정 김구를 지워한 그는 모택동 공산군과 싸우면서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존경하게 된다.
    ▲ 중국 국민당정부 장개석 총통. 상해임정 김구를 지워한 그는 모택동 공산군과 싸우면서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존경하게 된다.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동경에 도착한 이승만은 2시간 동안 맥아더를 만났다.  
       그리고는 장개석(蔣介石)을 만나기 위해 상해를 거처 난징(南京)으로 갔다.
       장개석은 원래 김구 지지자였지만, 모택동의 공산당과 싸우게 되면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 대표인 유어만(劉馭萬) 공사를 통해 김구에게 이승만과 협력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처 방안을 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는 장개석이 제공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태운 중국 비행기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서울 착륙 허가를 얻는 과정에서 또 한 차례 복잡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는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우익진영의 성대한 국민대회가 열렸다. 그만큼 한국인들 사이에는 남한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이다.  

       그날 연설에서 그는  그동안 남한에서 총선거가 지연된 것은 하지 중장이 공산주의자들과 합작을 고집했기 때문인데, 이제는 미국이 좌우합작을 단념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남북통일 정부를 세우기에 앞서 남한과도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이 곧바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동안 김구가 주도하는 국민회의가 자기를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추대했는 데도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미 국무부 차관보 힐드링과 정부 수립 절차를 밟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하지 중장은 즉각 반박 성명서를 내고 미국 정부는 그렇게 합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더욱 더 나빠졌다.
        

  • ▲ 공산당을 반대하는 이승만(오른쪽)을 하지 미군사령관은 미국의 방해물로 낙인찍었다.
    ▲ 공산당을 반대하는 이승만(오른쪽)을 하지 미군사령관은 미국의 방해물로 낙인찍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그러는 사이에 1947년 5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좌익들은 대환영이었다. 그들은 곧 임시정부가 수립된다고 선전했다.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도 환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위원회의 명의로 미⦁소공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질의서를 보냈다.

       즉, 신탁통치와 독립정부 수립은 서로 모순되는 것인데, 앞으로 그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사용되는 민주주의란 말은 ‘소련식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아니면 ‘미국식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 ▲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양측 대표. 하지 미군중장과 슈티코프 소련군대장.
    ▲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양측 대표. 하지 미군중장과 슈티코프 소련군대장.


       회의는 1차 때와 마찬 가지로 꼭 같은 문제로 맴돌았다.
    신탁통치 반대자들을 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이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측이 양보하고 말았다. 그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된 개인이나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협정에 반대하거나 반대를 선동할 수 없도록 했다. 즉,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면 반탁투쟁을 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미군측이 우파의 언론 자유를  제한하게 된 것은  빨리 소련군과 합의하여 한국인의 정부를 세워놓고 철수하려는 급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익은 분개했고, 이 때 “미국놈 믿지 말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이승만은 미국이 언론자유의 원칙을 포기하고 한국을 배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따라 우익학생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전학련)을 비롯해 청년단체들은 격렬한 반탁,반소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청에 의한 가택 연금

     
       그러나 우익 가운데서도 한민당과 한독당 일부 세력은, 이승만과 김구의 호소와는 달리,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했다. 그에 따라 협의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신청마감일인 6월 23일까지 신청서를 낸 남한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425개에 이르렀다.
       그러자 소련군측은 다른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그들 가운데서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해 있는 정당⦁사회 단체들은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의 우익은 물론,중간파 마저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키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앞으로 세워질 임시정부의 주도권은 좌익에게 넘어 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미군측은 언론자유의 명분을 들어 소련군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에 따라 회의는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미 군정청은 이승만을 가택연금 상태에 두었다.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 따라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 출연은 물론, 일반인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다. 전화도 철거되고, 편지도 검열을 받았다. 미국인들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졸지에 그는 미국의 적(敵)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에게 1947년 여름은 최악의 상태였다.

  • ▲ 193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였던 배희한(裵喜漢)이 궁궐 양식으로 건립한 팔작지붕의 한옥 목조건물이다. 이승만이 8·15광복 후 귀국한 뒤 1945년 10월부터 약 2년간 거처하던 곳으로서 한국 근대 정치의 역사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소유주 장진섭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불화설이 나돌자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승만은 마포장을 거쳐 이화장으로 이주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 193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였던 배희한(裵喜漢)이 궁궐 양식으로 건립한 팔작지붕의 한옥 목조건물이다. 이승만이 8·15광복 후 귀국한 뒤 1945년 10월부터 약 2년간 거처하던 곳으로서 한국 근대 정치의 역사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소유주 장진섭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불화설이 나돌자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승만은 마포장을 거쳐 이화장으로 이주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그렇다고 해서 미 군정청이 지지하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좌익은 1947년 2월의 국대안반대투쟁, 2⦁27구국투쟁, 3월22일의 총파업, 7⦁27군중투쟁을 거치면서 폭력으로 나갔다.
       그에 따라 남한 땅은 사공도 목적지도 없이 흘러가는 배와 같아 보였다.  <계속>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