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사실상 마무리 수순에 접어든 가운데, 그동안 논란이 번지는 데 도화선 역할을 한 서울대 교수의 보고서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싼 직업병 사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까닭은 지난 2009년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내놓은 보고서 때문이다.
당시 보고서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과 인과관계가 있는 벤젠이 검출됐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보고서는 국회와 법정에까지 제출되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반올림이 삼성전자 공장을 '죽음의 사업장'으로 묘사하며 시위를 이어가는 데도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하지만 백 교수는 2년 뒤인 2011년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진행했던 실험 과정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제출하라는 법원의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너무 오래(2년)된 자료여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게 백 교수의 항변이었다. 공문서의 경우 5년간 보존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백 교수가 이를 어긴 셈이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당시 실험을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나눠 하다 보니 과거 자료를 요청하기 어려웠다"며 "삼성도 인바이론을 통해 진행한 조사 결과를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실험 목적은 (오직) 유해물질을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면서 "법원에 내기 위해 5년씩 자료를 들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백 교수의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백도명 교수의 벤젠 보고서'가 삼성 반도체 공장을 에워싼 직업병 논란의 시발점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가 어찌됐든, 삼성은 지금까지도 '벤젠 스캔들'로 골머리 앓고 있다. 인체에 해를 가할 정도의 벤젠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각종 연구보고서와 삼성의 반박은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가 됐다.
그러나 복수의 화학업계 전문가들은 전 세계 어느 사업장이든 벤젠이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동차 연료용 휘발류에도 벤젠이 미량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벤젠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더라도 공장에는 벤젠이 충분히 검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벤젠을 구성하는 원소가 공기를 이루는 산소와 질소보다 무겁기 때문에 극미량만 존재할 경우 사람의 코나 입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게 이들의 중론이다. 백 교수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발견한 벤진이 극미량이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결국 '벤젠이 발견됐다'는 문구 하나에 온나라가 침소봉대한 탓에 활동가단체나 다름없는 반올림이 피해자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7년에 터진 문제를 무려 8년 넘게 끄는 데도 불씨가 됐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 12일 마지막 퍼즐이 풀렸다.
삼성전자와 가대위(가족대책위원회), 반올림 등 3개 교섭주체는 이날 조정위원회(조정위)가 제시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3자간 합의 과정에서 가장 첨예한 부분으로 꼽혔던 사고 예방책을 세우는 과제를 두고 원만하게 타협을 이룬 것이다.
직업병 문제의 3가지 조정 의제는 보상과 사과, 재해예방 대책이었다. 이 가운데 보상의 경우 지난해 말 이미 100명이 넘는 신청자가 보상을 받으면서 종지부가 찍혔다.
사과 부문 역시 삼성전자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이 신청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전달되면서 매듭지어졌다.
송창호 가대위 대표는 "보상과 사과가 마무리됐기 때문에 조정위 회의에 참석한 것"이라면서 "더 이상의 추가 조정은 필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 실장은 "백도명 교수는 전문가 자격으로 조정위에 참석한 것인데, 파급력이 큰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자료 내용에 자신의 연구결과가 담겼다면 철저히 챙겼을 텐데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