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프린터 등 신산업 적용 현실적으로 불가...여야, 특별법 제정 공감대
  • ▲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RB) 본사가 입주해 있는 국제금융센터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살인기업 옥시규탄 및 옥시 상품 불매운동 기자회견장에 한 시민이 던져진 옥시제품들을 촬영하고 있다. ⓒ 사진 뉴시스
    ▲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RB) 본사가 입주해 있는 국제금융센터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살인기업 옥시규탄 및 옥시 상품 불매운동 기자회견장에 한 시민이 던져진 옥시제품들을 촬영하고 있다. ⓒ 사진 뉴시스

[사례1]
2011년 초,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 호흡을 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산모와 갓 태어난 신생아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급성호흡부전으로 고통을 겪던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숨을 거뒀다. 생존한 이들의 예후도 좋지 않았다. 많은 환자가 무거운 산소통과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힘겨운 투병생활을 계속 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정부의 조사결과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긴 주범은, 흡입할 때 독성이 나타나는 액상 가습기 살균제였다. 최초 사망자가 발생한지 15년, 가습기 살균제가 사망의 원인이란 사실은 알려졌지만, 피해 배상 혹은 보상은 먼 나라 얘기다.

정부는 부처끼리 서로 책임을 떠넘기다가 원인 규명과 피해자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소중한 골든타임을 놓쳤고,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와 원료 물질 공급사는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는 데만 골몰했다.

그 사이 최소 95명에서 최대 200명이 넘는 아까운 생명이 가족의 곁을 떠났다. 적어도 126명 이상의 환자가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호흡 곤란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조사로부터 정당한 배상을 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제조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근거법률인 제조물책임법이 정한 시효 때문이다.

이 법은 손해발생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첫 사망자가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1년이다.

때문에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기존 제조물책임법의 허점을 보완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례2] 
2020년 4월, A는 3D프린터 모델링 데이터 공유 사이트에서 도면을 내려 받아 직접 자전거를 만들어 아들에게 생일선물로 줬다. A가 만들어준 자전거를 타고 놀던 아들은 안장이 부서지면서 크게 다쳤다. 

그러나 A씨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제조물책임법 상 3D도면을 공유사이트에 올린 사람을 제조자로 볼 수 있는지 법리상 논란이 있고, 도면을 최초로 공유한 사람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례3] 
B는 아내를 태우고 운전 중, 갑자기 차량이 급발진 해 앞에 있는 음식점으로 돌진하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이 사고로 B와 아내는 전치 8주의 부상을 입었고, 손해를 입은 음식점주의 피해도 물어줘야만 했다.

B씨는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1심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차량의 급발진이 ‘제조물의 결함’ 때문임을 입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B는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으나,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높지 않다. 변호사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동차 회사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소송을 끝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전담수사팀이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관계자들을 줄 소환하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제조물책임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를 보호하기 위한 민법의 특별법이다. 결함있는 제조물을 만들거나 판매한 사람에게 민사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형사처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이 법이 중요한 이유는,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결함이 인정되는 경우, 그 결과는 검찰의 수사 및 법원의 양형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질수록 역설적으로 제조물책임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건국 이래 ‘최초-최대 규모의 제조물 책임 사건’이란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제조물책임법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실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피해자들에게 제조물책임법은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부실한 입법에 불과하다.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제조물책임법이 안고 있는 모순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제조자의 면책 사항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법 제4조).

예를 들어 당시 과학기술 수준으로 결함을 알 수 없었거나, 당시 법령이 정하는 기준을 지킨 경우, 제조사는 손해배상의 책임이 없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과 같이 불특정 국민들이 대규모 피해를 입더라도, 해당 제품이 당시 법령이 정하는 기준에 맞게 만들어졌다면, 제조사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제조물책임법의 실효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제조자의 책임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법이, 오히려 기업들에게 합법적 면책의 창구가 되고 있다는 날선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제조물책임법과 관련해서는 피해자가 제조물의 결함을 입증하기 곤란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시효를 현실에 맞게 더 늘리거나, 시효의 시작기준(기산일)을 새롭게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제조물책임법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3D프린터, 가상현실, 자율주행자동차, 로봇, 드론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현실을, 현재의 제조물책임법은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계기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는 이면에는 제조물책임법에 대한 불만이 놓여 있다.

특별법이 제정된다면, 그 안에 최우선적으로 들어가야 할 사안은 시효 관련 조항이다.

제조물의 결함을 이유로 한 민사상 손해배상과 책임자 처벌에 있어서는 사실상 시효 제한을 없애거나, 시효기간 자체를 현재보다 대폭 늘리는 방안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제조물의 결함을 입증하는데 있어 피해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제조물 결함 여부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역설적으로 부도덕한 제조사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3D프린터와 같이 새로운 산업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법령 전체의 내용과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아가 피해자 조사 및 피해 발생 원인 규명을 위한 절치와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피해의증 환자들에 대한 보호방안도 마련돼야 한다.

정부기관 담당자를 비롯해 피해를 발생·확산시키는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가중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의 신설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늦었지만 여야 정치권이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뜻을 모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새누리당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29일,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피해보상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정책위의장은 이날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사정이 어려운 피해자들에게 정부가 우선 피해보상을 해주고, 나중에 옥시 등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8일,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당 역시 특별법 제정을 포함해 근본대책을 논의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 제정은 여야 합의로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