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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동 정전①][르포]"9시간만 복구 열대야에 기진맥진…'효율 vs 안전' 또 딜레마

4일 오후 11시 변압기 고장… 현장출동후 사라졌다 익일 오전 8시 작업68세대 열대야에 기진맥진… 모텔·PC방·친구집·옥상 등 한밤의 피신열전한전 "시민 불편보다 작업자 안전이 최우선"… 오락가락 안내로 혼란 가중

박준호·이희정 기자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22-08-11 09:54 | 수정 2022-08-11 10:37

▲ 지난 4일 다세대주택이 몰려 있는 서울 관악구 행운동에 변압기 고장으로 정전사고가 발생했다. 다음 날 오전 복구작업 중인 한전.ⓒ제보자

#이모씨(49·회사원)는 지난 4일 야근을 마치고 귀가했다가 깜짝 놀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자가격리중인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집안 전기가 나간 것이다. 오후 11시15분쯤. 두꺼비집을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창밖을 내다본 이씨는 근처 다른 집들도 불이 꺼진 것을 확인했다.

낮 최고기온이 32.9℃까지 오르고 열대야가 연일 기승을 부렸던 지난 4일 서울 관악구 행운동 일대 68세대 주민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갑자기 전기가 끊기면서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틀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가 집밖으로 나오자 무슨 영문인가 싶어 나온 20여명의 주민들이 인근 편의점 앞에 모여 있었다. 이씨는 휴대전화로 한전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상담원은 이미 접수된 건이라며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후 현장에 출동한 한전 직원은 변압기가 고장이라고 했다. 변압기는 발전소에서 생산한 고압의 전기를 220·380V로 변환해 가정과 상가 등에 배분하는 설비다.

출동직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잠시뒤 현장을 벗어났다. 이씨를 포함한 몇몇은 출동직원이 돌아와 복구작업을 서두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출동직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변압기 등 부품을 가지러 갔겠거니 생각했던 이씨는 한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가 황당한 얘길 들었다. 변압기 고장이면 2~3시간쯤 걸리는데 작업자 안전문제로 야간에는 작업할수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실제로 한전은 다음날 동튼후에야 복구·교체작업을 벌였다. 밤새 옥상에서 뜬눈으로 날을 샜다는 이씨 말로는 5일 오전 8시쯤 현장에 한전 작업차량이 다시 나타났고 8시15분쯤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작업차량은 8시24분쯤 현장에서 철수했다. 순식간(?)에 복구작업이 끝난 셈이다.

▲ 지난 4일 발생한 서울 관악구 행운동 정전사고로 더위를 피해 옥상에 임시 잠자리를 마련한 모습.ⓒ제보자

복구작업은 단 15분만에 끝났지만 행운동 68세대 주민은 정전된 8시간55분간 무더위와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두 아이를 둔 주부 최모(40)씨는 자는 아이들을 깨워 정전 안된 인근 PC방으로 피했다. 최씨는 "자정이 지나 아이들을 깨우고 PC방으로 데려가는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한전에서 연락이 없다 보니 언제까지 PC방에 머물러야 하는지 몰라 답답하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20대 김모씨는 "너무 더워 1시간마다 찬물로 샤워해야 했다"며 "도저히 잠을 잘수 없었다"며 "더위에 힘들어하는 강아지한테 밤새 찬물을 끼얹어 줘야 했다"고 하소연했다.

몇몇 주민은 더위를 피해 멀쩡한 집을 놔두고 모텔을 찾아갔다. 일부는 가까운 친구·연인·동료에게 도움을 청해 몸을 피했다.

사고 변압기 근처 편의점에선 70대 진모씨가 진열된 도시락·삼각김밥·샌드위치 등 신선식품을 옮기느라 진땀을 뺐다. 진씨는 "금방 복구될 줄 알고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으니 매장온도가 30도 가까이 오르더라"며 "음식이 다 상할거 같아 불이 들어오는 냉장고로 하나씩 옮겼다"고 설명했다. 편의점주 신모(68)씨는 "그나마 냉동고와 아이스크림 냉장고는 전기 배선이 달라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민들은 한전의 부실 대응에 불만을 토로했다. 애초 한전이 변압기가 문제면 복구작업에 2~3시간이 걸린다고 하지 않고 야간작업은 안한다고 솔직히 안내했더라도 주민들이 새벽 2시가 넘도록 넋놓고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한전 측은 일부주민에게는 "변압기 거래처가 파업중이어서 아침에 작업할 수 밖에 없다"고 안내하고 다른주민에게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후 안전사고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일몰이후에는 작업자 안전을 우선시해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오락가락한 설명으로 혼란만 부추겼다.

진씨는 "작업자 안전만을 고려해 야간작업은 안한다는게 말이 되느냐"며 "강남지역 같았으면 한전에서 그렇게 했겠나 싶다. 이 동네가 다세대주택에 서민들만 모여 사니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 같다"고 억울해했다.

한전은 자사 서비스헌장에 "정전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복구하며 천재지변 등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정전을 알게 된 시점부터 1시간 이내에 복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런 와중에 한전은 정전사고를 신고한 주민들에게 서비스 만족도 평가에 참여해달라는 '카톡'을 보내 원성을 사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고장 즉시 복구에 나섰지만, 올 초 안전사고가 크게 문제 되면서 안전교육이 강화됐다"며 "이제는 시민 불편이 예상되더라도 작업자 안전을 먼저 챙기자는 기조다. 사람 목숨이 최우선이다"고 밝혔다.

▲ 지난 4일 다세대주택이 몰려 있는 서울 관악구 행운동에 변압기 고장으로 정전사고가 발생했다. 다음 날 오전 복구작업 중인 한전.ⓒ제보자

박준호·이희정 기자 Jules@newdailybiz.co.kr, hjlee@newdaily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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