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별 잔액기준 대출금리 공개KB·신한, 연 4.93% 동일… 하나도 4.92%로 비슷가계대출금리가 곧 소비자가격… 의구심 커져1, 2차 조사 마친 공정위 판단 주목
  • ▲ 한자리에 모인 금융지주 회장들과 금융감독원장. 왼쪽부터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 윤종규 KB금융 회장, 김태오 DGB금융 회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뉴데일리DB
    ▲ 한자리에 모인 금융지주 회장들과 금융감독원장. 왼쪽부터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 윤종규 KB금융 회장, 김태오 DGB금융 회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뉴데일리DB
    독과점 산업의 가장 큰 폐해는 가격 담합입니다. 국제 유가는 폭락했다는데 주유소 가격은 그대로일 때 화가 나죠. 반대로 유가가 폭등하면 일시에 기름값도 오릅니다. 4곳에 불과한 정유사가 '이 가격 이하로는 팔지 말자'고 담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유사는 늘 비슷한 해명을 내놓습니다. 유가가 내릴때는 비축한 재고를 소진해야 한다 하고, 오를때는 유가 상승을 예상한 소비 수요가 늘어나 비축유가 동났다며 목에 힘을 주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가격 담합 증거가 없으니 무턱대고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은행도 대표적인 과점 산업입니다. KB·신한·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농협은행도 있지만, 설립 목적도 다르고 농협중앙회가 100% 지분을 보유한 지배구조도 시중은행과 차이가 있습니다.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토스뱅크 등 인터넷은행은 아직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시장 영향력이 크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은행은 시중에서 자금을 빌려와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주고 받는 이자수익으로 먹고사는 회사입니다. 유망한 기업에 투자하거나 금융상품을 팔아 수수료를 챙기기도 하지만 이자수익에 비하면 크지 않죠. 4대 은행이 올해 상반기 올린 이자수익은 16조6598억원입니다. 역대 최대 기록이죠.

    국제 유가가 오르면 정유사가 돈을 벌 듯 돈의 가격인 금리가 오르면 은행들도 돈을 쓸어담습니다. 상반기 쌓아올린 사상 최대 이자수익도 한국은행이 꾸준히 기준금리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싼 금리로 조달한 자금을 비싼 금리로 대출해주니 마진이 커지는 구조입니다. 생산단가를 낮추고 판매가를 높이는 건 기업의 당연한 생리니 이것까지 따지긴 어렵습니다.

    은행마다 자금조달비용(원가)은 천차만별입니다. 비싼 이자를 주고 정기예금을 유치하기도 하고, 채권이나 증권을 발행해 대규모 자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연 이율 0.1% 정도인 수시 입출금 계좌에 든 돈은 원가가 매우 싼 자금이죠.

    공격적인 자금유치로 과거 저금리 시절 많은 돈을 쌓아둔 은행이라면 고금리가 된 지금 더 싼 금리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은행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는 기회의 시기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전히 은행마다 대출금리는 거기서 거기죠. 국제 유가가 폭락했다는 뉴스를 듣고 주유소를 찾았더니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몇 원 차이로 도토리 키재기 하고 있는 것 처럼요.
  • ▲ 한자리에 모인 금융지주 회장들과 금융감독원장. 왼쪽부터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 윤종규 KB금융 회장, 김태오 DGB금융 회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뉴데일리DB
    이번에 꽤 유의미한 수치가 나왔습니다. 은행별 잔액 기준 대출금리라는 자료인데요. 그동안은 신규 취급액 기준으로만 발표했었습니다. 은행별로 매달 다른 자금 사정에 따라 월별 신규취급되는 대출금리로는 가격 담합 정황을 잡아내기 어려웠습니다. 이번 달은 A은행이 싼 금리로 대출 영업에 집중하고, 다음달은 B은행이 하는 식이죠. 4대 은행이 돌아가며 금리를 낮췄다 올리기를 반복한다면 금융당국과 소비자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잔액 기준 대출금리는 다릅니다. 그동안 금융소비자에게 내준 전체 대출의 평균 금리기 때문에 은행들이 장기적으로 일정 가격(금리)를 지향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가격 경쟁을 자제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가격을 담합했다는 의심을 살 수 있는 대목이죠.

    차주별 신용등급이 천차만별인 기업대출금리를 제외하고, 정부가 각종 기금으로 시행하는 정책서민금융금리를 제외한 잔액 기준 가계대출금리를 보면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연 4.93%으로 똑같았습니다. 업계 1, 2위 은행이죠. 3위인 하나은행도 거의 비슷한 연 4.92%였습니다.

    은행의 예대마진을 가늠하는 예대금리차를 구할 때 대출금리에서 빼는 수신금리는 국민(2.36%), 신한(2.50%), 하나(2.72%)로 달랐지만, 대출금리는 놀랍도록 일치했습니다. 가격 담합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업계 4위 우리은행 대출금리는 연 4.80%로 1~3위 은행들보다 낮았는데요. 아마도 실적 상승을 위해 공격적인 대출영업을 펼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잔액 기준 대출금리 공시는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 산업의 과점 폐해가 크다"는 지적 이후 금융당국이 6개월 간의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며 만든 제도입니다. 윤 대통령은 당시 "모든 수단을 열어놓고 과도한 지대추구를 막을 방안을 강구하라"며 단단히 당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정위원회는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금리 담합 여부를 조사 중입니다.

    은행권은 국내 20개 가량의 은행이 경쟁하고 있어 담합이 어렵다고 항변합니다. 또 금융시장 구조상 다른 은행과의 소통 채널을 운영하는 것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과거 공정위가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을 조사했지만, 끝내 무혐의 결론났다는 사례를 들어 이번에도 지나친 압박이라는 푸념도 내놓습니다.

    은행들에게 마냥 경쟁을 부추기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부실한 대출이 생기기 마련이죠. 요즘처럼 연체율이 높아지는 시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금융 안정을 앞세워 가격 담합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땅짚고 헤엄치기식 영업으론 글로벌 금융산업 경쟁력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금융당국의 은행 개혁과 공정위의 담합 조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금융 안정을 위한 긴밀한 소통과 공조인지, 이자수익을 나눠먹기 위한 담합인지 쉽사리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번에도 적당한 선에서 주의를 주고 넘어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처럼 은행 전반에 퍼지는 위기감은 긍정적입니다. 한 금융지주 고위 관계자는 기자에게 "요즘은 금융당국보다 소비자들이 더 무서운 시대"라고 하더군요. 10년을 들락거린 주거래은행이라도 금리 0.1% 차이에 미련없이 돌아서는 똑똑해진 소비자 얘기입니다. 강화된 공시 규정을 기회로 은행들의 선의의 경쟁이 투명하게 이뤄지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