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어려워진 금융 지표에 불확실성 극대화예산 짜다 찢고 다시 짠다 … 투자 위축 우려환헤지 어려운 中企 직격탄 … 변동성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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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연수구 인천신항 컨테이너 터미널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뉴시스
국내 정유회사 임원 A씨는 매일 환율 변동에 따른 마진율과 관련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원래 월 1회 보고하는 것에서 지난달 주단위로 좁혀졌고, 최근에는 매일 변동사항을 보고하는 게 일상이 됐다. A 상무는 "환율이 10원만 뛰어도 수익이 억단위로 변하다 보니 기준점을 잡기 어렵다"며 "결국 1450원, 1500원, 1550원까지 다양한 시나리오로 사업계획을 짜야 해 회의가 끝이날 줄 모른다"고 했다.원달러 환율이 끝없는 상승을 이어가며 기업들이 내년 사업계획을 짜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500원 돌파는 시간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재무팀은 내년 예산을 짜다 찢고 다시 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기업들은 최대한 투자계획을 줄이는 소극적 접근법을 고수하는 등 부실한 사업계획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1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1471.0원) 보다 1.40원 오른 1472.4원으로 거래가 시작됐다. 지난 9월 24일 1400원을 넘어선 이후 상승세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7일 1460.0원으로 1450원대를 뛰어넘은 이후 4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자 이날 외환당국이 급히 개입해 1450원 대로 레벨을 낮추는 등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환율이 요동치면 수출기업은 직격탄을 맞는다. 당장 사들여야 할 원자재 구입 비용이 치솟고, 해외에서 빌린 달러 부채 부담도 커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우리 주요 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미국 등 해외에 대규모 설비투자를 늘리면서 달러 부채가 크게 늘어난 상태다.원유를 100% 달러로 수입하는 석유화학 업계와 수입 철광석을 취급하는 철강업계는 환율 상승 취약한 전통 산업이다. 제품을 팔수록 환차손이 쌓이는 구조여서 가격 인상 요인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석유화학과 철강 제품 가격이 오르면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으로 부담이 이어진다. 과거와 달리 내수마저 얼어붙은 상황이어서 부담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이번 환율 급등에 유독 기업들이 힘들어하는데는 올해 세웠던 계획이 상당부분 틀어졌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올해 초 50대 기업의 사업 계획을 분석한 결과 기업 33.3%가 원/달러 1350~1400원을 상정해 짠 것으로 나타났다. 이보다 낮은 1300~1350원으로 전망한 기업은 29.6%였고, 현재 수준인 1450~1500원을 전망한 기업은 11.1%에 불과했다. 90%에 가까운 기업들이 전망과 다른 환율을 현실로 겪고 있는 셈이다.한 조선 기자재 회사 대표는 "1300원대 환율이 이어질 걸로 보고 설비투자와 인력을 늘리는 계획을 세웠는데 모두 틀어졌다"며 "환율로 이미 한 번 크게 데인 터라 내년 계획은 아예 보수적으로 짜자는 분위기”라고 했다. -
- ▲ 수출 대기 중인 자동차들ⓒ연합뉴스
수출도, 수입도… '계산서 안 맞는' 전통 산업일반적으로 조선·해운·자동차 등 달러 매출 비중이 높은 업종은 고환율이 호재다. 하지만 석유화학·철강처럼 원자재 수입이 많은 업종은 생산비가 치솟으면서 ‘환율 장사’가 오히려 손해가 된다. 반도체·가전은 해외 매출 비중이 높고 현지 생산도 많지만, 부품과 소재를 수입하는 비중도 상당해 환율 득실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고환율 타격은 중소기업이 훨씬 크게 맞는다. 대기업의 경우 환차손을 대비하는 각종 금융상품을 통해 환헤지(위험회피)를 대비하지만, 중소·중견기업들은 이런 보호장치에도 벗어나 있어 더 큰 타격이 예상된다. 이들 중소·중견기업들이 활용하는 무역차입금(달러대출)은 만기가 6개월에서 1년 가량의 단기상품으로 대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곧바로 부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한 자동차 2차 협력업체 관계자는 “원가 부담 때문에 납품 단가 인상을 요구하면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거래 중단 압박부터 받는다”며 “지금 상황에선 설비를 새로 깔거나 인력을 늘리는 계획을 짜는 것 자체가 모험”이라고 했다.1500원 넘나드는 구간, 투자 버튼 누르기 쉽지 않아전문가들은 단기 급락이 아닌 ‘고환율의 일상화’가 기업 투자 심리를 얼어붙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연말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업 의사결정 전반을 위축시키는 모습이다. 기업들로 하여금 한층 보수적인 재무·투자 전략을 강제한다는 의미다.한 중견 철강업체 임원은 “작년까지만 해도 환율이 일시적으로 올랐다가 내려올 거라는 ‘복원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1400~1500원대를 몇 년 이상 전제로 해야 하는지부터 논쟁이 붙는다”며 “결국 내년 설비투자와 M&A 계획을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고용 계획도 최소한으로 조정했다”고 말했다.한 자동차 부품 업체 재무담당자는 “연말 환율이 1400원 초반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한번 1500원을 보고 나면 누구도 쉽게 ‘지금이 저점’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며 “환헤지 비용까지 늘어나서 공격적인 투자를 논의할 여유가 없다”고 했다.기업들은 단기 환율 예측보다 ‘변동성 통제’에 정책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문한다. 중소·중견 제조업체일수록 환헤지 수단이 제한적인 탓에,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도 예측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기 때문이다.한 중소 플라스틱 가공업체 대표는 “1500원이라도 그 근처에서 1~2년 유지된다면 그에 맞는 가격 정책과 투자 계획을 짤 수 있다”며 “문제는 지금처럼 1300원대에서 1500원 가까이까지 몇 달 사이에 널뛰는 구간”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