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한은, 환율 불안 속 개인 투자자 책임론 부각세금 강화·연금 동원 … 단기 개입에 정책 신뢰 추락투자와 생산 위축 속 자본 역외 유출 가속 우려환율은 시장 탓 아닌 성장성 … “정책 프레임 전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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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율이 장기화하고 기준금리가 또 묶인 가운데, 한국은행은 해법의 화살을 시장과 국민에게 돌렸다. 이창용 총재는 환율 급등에 경제의 균열이 드러나는 상황에서도 개인 투자자와 연금을 지목하며 '시장 탓'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부의 세제 중심의 땜질식 환율 대응에 중앙은행 수장까지 발을 맞추면서 원화 약세 해법이 더욱 단기적이고 정치적으로 흐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7일 기준금리를 연 2.50%로 4회 연속 동결했다. 이 총재는 이날 "높아진 환율, 내수 회복세 등의 영향으로 물가가 지난 전망보다 다소 높은 수준으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며 금리 동결의 배경을 밝혔다. 1470원을 넘보는 고환율, 서울 집값 재상승, 가계대출 증가라는 삼중 리스크 속에서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금리 동결은 곧 "한은이 더 이상 쓸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됐다"는 신호로 해석했다.특히 이 총재는 "해외투자 확대가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서학개미와 연금의 투자 패턴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젊은 층이 미국 주식이 쿨해서 투자한다"는 우려를 내비치면서 사실상 서학개미를 철없는 투기 참가자로 묘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연금 환헤지를 강화하는 정부 계획을 두고도 "희생이 아니라 보호"라고 했다.정부 역시 환율 방어를 명분으로 해외주식 양도세 강화 가능성을 열어두며 시장을 자극하고 있다. 해외주식 매매차익 250만원 이상에 이미 22%의 세금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과세 강화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도 ‘환율 안정화 동원령’ 대상이 됐다. 외환 스와프 확대, 환헤지 강화, 국내주식 비중 상향(TAA 활용) 등이 모두 거론된다.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외환 불안 원인을 구조적 문제에서 찾기보다, 투자자 탓을 프레임화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즉각 제기됐다. 정부가 해외 주식 양도세 추가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국민연금까지 환율 방어에 동원하려는 상황에서 한은 총재가 정부 논리에 사실상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지적이다.실제 한국경제에서 자본 이동의 방향은 이미 명확해졌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해외주식 개인투자자 보관금액은 1564억 8011만 달러(230조 8238억원)로 전년대비 28.74%나 늘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국민소득 대비 순해외투자(내국인의 해외투자–외국인의 국내투자) 비중을 보면 2000~2008년 0.7%에서 2015~2024년 4.1%로 약 6배 증가했다. 국민연금도 해외 주식 비중을 38% 이상으로 확대하며 486조원을 바깥에서 굴린다.기업이나 가계 입장에서는 국내에 투자할 유인이 줄고, 대신 해외투자로 눈을 돌릴 유인이 커졌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국내 자본시장의 매력 부족은 생산·투자 지표의 부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0월 전산업생산은 2.5% 감소, 반도체 생산은 26.5% 급감해 43년 만의 최대 폭락을 기록했다. 설비투자(-14.1%)와 건설기성(-20.9%)도 큰폭 감소했다. 추석 특수로 소매판매(+3.5%)는 증가했지만 서비스업 생산(-0.6%)은 되레 위축됐다.이런 상황에서 서학개미에 세금을 더 물리고, 국민연금의 위험자산 운용 여지를 묶는 방식은 정책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 접근이라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추가 규제가 투자를 위축시키면 오히려 외화 자산을 더 움켜쥐게 하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 자본 이동이 막히면 환전 수요는 오히려 감소하고 원화 약세는 장기화한다.과거 실패한 정책 패턴에서도 이 같은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2017~2021년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세금과 대출 규제라는 손쉬운 처방만 이어가며 실수요 압력과 공급 부족을 외면했고, 결과는 집값 폭등이었다. 정책 불신이 누적될수록 시장은 한국에 더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해외 사례는 힌트를 준다. 일본은 엔화 약세를 방치한 대가로 장기 저성장에 빠졌고, 다시 빠져나오기 힘든 '약한 통화의 함정'에 갇혔다. 반면 싱가포르와 스위스는 글로벌 자금 유입을 기반으로 환율을 방어하고 있다. 미국은 규제 완화, 혁신투자, 자본시장 개방으로 달러 신뢰를 강화하고 있다. 공통점은 환율을 '세금'이 아닌 '국가 경쟁력'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이 총재가 시장 탓을 하며 정부 논리를 추앙할 때가 아니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원화가 저평가 통화로 고착될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에서 정책 결정자가 비판의 대상을 국민에게 돌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내 자본시장 신뢰 회복, 혁신·투자 활성화, 생산성 제고 등 구조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는 환율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조용구 신영증권 리서치센터 연구위원은 "한·미 투자협정 등 구조적으로 외화 수요가 더 늘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까지는 1400원대 고환율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다른 금융 애널리스트는 "원화 약세는 세금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성의 문제"라며 "중앙은행 수장의 메시지가 시장 신뢰를 더 흔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