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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PT 생성 이미지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환율은 시장 심리를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는 지표인데, 정부가 무슨 메시지를 던지든 결국 숫자가 말한다. 불과 1년 전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직후 환율이 1400원을 넘겼을 때 사회 전체가 ‘경제 신뢰 붕괴’라며 소란스러웠다. 지금은 그때보다 높은 환율 앞에서도 위기감이 무뎌졌다. 시장 신호를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현실 감각을 잃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반년이 지났지만 경제 체력 회복은커녕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 '정권 교체가 경제를 안정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환율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시장은 이미 '이재명 리스크'를 환율에 반영하고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국내외 대형 충격이 발생한다면 환율은 어디까지 치솟을까. 1600원, 1700원 전망도 과장이 아니다. 미국 LA공항에선 원달러 환전 시 2100원 얘기까지 나온다. 원화 신뢰가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정부와 당국의 해석은 엇나가 있다. 고환율의 원인을 국내 정책과 구조 문제에서 찾기보다 "글로벌 달러 강세", "서학개미 해외투자 증가", "증권사 환전 시스템 문제" 등 다른 요인으로 돌린다. 고환율 부담을 투자자와 금융사에 화풀이하듯 떠넘기는 분위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환율 흐름엔 내국인의 해외주식 투자, 특히 서학개미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며 청년층의 해외투자 열풍을 우려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오죽하면 청년들이 해외투자를 하겠느냐"고 말하면서도 서학개미 영향론을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통계는 다르다. 개인 투자자의 외환 거래 비중은 하루 평균 0.43%에 불과하다. 환율을 흔들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정부 일각에서는 서학개미 투자를 억제하고 해외주식 과세를 검토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금감원은 증권사 해외투자 영업을 들여다보겠다며 현장점검에 착수했다. 첫 조사 대상은 한국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이고, 이후 다른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까지 확대한다. 표면적으로는 '투자자 보호'지만 실제로는 고환율 부담을 금융사에 우회적으로 전가한다는 지적이다.
반면 시장 전문가들의 진단은 전혀 다르다. 현 정부의 재정 운용은 현금성 지출에 치우쳐 있고, 금리 인하 압박과 정책 혼선, 한미무역협상 실패 등이 자금 이탈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국내 증시 상승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일부 대형주에만 집중돼 있고, 산업 정책은 규제와 정치 충격 속에 갇혀 있다. 외부 요인보다 내부 정책 불확실성이 환율 상승의 더 큰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고환율의 부담은 이미 국민이 떠안고 있다. 수입 원가는 주유소와 식탁 물가로 직격탄을 날리고 있고 기업은 비용 압력을 가격에 전가하고 있다. 수출 대기업 일부만 이익을 보는 구조에서 국민과 내수 산업은 반대 방향의 고통을 감당한다. 약한 통화에 장기 투자 자금이 유입되기 어렵다는 금융의 기본 원칙도 잊혀진 듯하다.
증권가 전망 또한 어둡다. 최근 업계 한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내년 환율이 1410~1540원 사이에서 움직이고 평균적으로 1450원 안팎의 강달러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미 1470원까지 오른 상황에서 원화 약세가 유지되면 1500원 돌파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미국 달러 지수가 약세를 보일 수 있지만, 하반기 경기 회복 국면에서는 다시 반등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더 중요한 대목은 시장이 한국의 환율 흐름을 일시적 요인이 아니라 정책 신뢰 리스크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환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대로 간다면 시장은 더 큰 숫자로 답할 것이다. 지금의 1500원은 단순한 환율이 아니라 정부당국 운영 성적표다. 구조 개혁은 미루고 재정만 쏟아붓고, 정쟁과 규제만 반복된다면 원화는 더 추락할 수 있다.
OECD는 최근 미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0%, 한국의 성장률은 1.0%로 예상했다. 통화 가치는 그 나라의 경쟁력을 반영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화 가치 하락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명도, 화풀이할 희생양 찾기도 아니다. 집중해야 할 대상은 서학개미나 금융사가 아니라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정부와 당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