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 실적 비중 50~60% 축소, 내부통제·소비자보호 비중 20~40% 확대사고 한 건이면 전사 KPI 감점 … 성과급·승진 ‘직격타’ 구조로 전환미·EU는 이미 사고 예방 중심, 한국도 ‘사전통제 체제’ 전환 시동은행권 “통제경쟁 시대” 긴장 … 영업위축·보고행정 부작용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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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감독원이 내년부터 시중은행 KPI(성과평가) 체계를 전면 손질할 방침이다. 핵심은 실적 위주 평가에서 내부통제·소비자보호 중심 평가로의 전환이다. 영업성과를 많이 올려도 횡령·배임·부정대출 등 금융사고가 한 건 발생하면 KPI가 대폭 감점되고, 성과급·승진까지 영향을 받는 '패널티형 KPI' 도입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29일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금감원은 ▲실적 평가 비중 축소(현 80~90% → 50~60%) ▲내부통제·소비자보호·리스크 관리 비중 확대(10% 미만 → 20~40%) ▲사고 발생 시 KPI 감점 및 성과급 삭감 연동을 골자로 하는 개편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다. 기존 KPI가 매출·점유율 중심이었다면, 개편 뒤에는 사고 재발률·민원 증가·전산 장애 대응·불완전판매 비율·내부통제 준수율이 주요 평가요소로 들어간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KPI는 각 금융회사가 매년 매년 1~2월 수립하는 성과지표다. 금감원이 직접 의무화해 설정하는 방식은 아니며, 은행 이사회·경영진이 항목을 정하고 금감원이 이를 감독·점검하는 구조다. 하지만 금감원은 경영실태평가 반영, 검사·시정권고, 사고 다발 시 재점검, 민원·리스크 평가 연동 등을 통해 KPI에 통제지표를 사실상 강제할 수 있다. 법적 강제력 없는 권고라도 경영평가 등급 하락·CEO 보수·연임 영향·검사 강화 등 평가·제재가 연결되기 때문에 금융사는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새 기준이 자리 잡으면 횡령·배임·부정대출 등 사고가 단 한 건만 발생해도 KPI 총점이 크게 떨어지고 보너스·승진이 제한되는 구조가 유력하다. KPI 항목도 기존 '판매량·순이익·점유율' 중심에서 '내부통제 준수율·사고 재발률·전산장애 대응속도·불완전판매 비율' 등이 핵심평가 요소로 올라올 전망이다. 평가 방식 역시 성과 가중치가 줄고 리스크 점검 비중이 늘어 '얼마 벌었나'보다 '사고 없이 벌었나'가 핵심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금감원이 감독·검사·경영평가 권한을 통해 내부통제·소비자보호 지표 비중을 확대하도록 압박하는 방식으로 KPI 개편을 추진할 것으로 점쳐진다"며 "이르면 1월 중으로 개편 초안을 마련해 은행권에 의사를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감원이 칼을 빼든 배경에는 올해 연말까지 이어진 금융사고 급증에 있다. 5대 은행에서만 10억원 이상 사고가 25건, 피해액은 2000억원대를 넘어섰다. 신한은행은 대출사기·본점 횡령·베트남 법인 사고까지 겹치며 100억원에 육박했고, 국민은행·우리은행에서도 해외 법인에서 배임·부정대출이 되풀이됐다. "실적은 사상 최대, 사고도 사상 최대"라는 냉소가 나올 만큼 내부통제의 구멍이 드러난 해였다.

    앞서 이찬진 금감원장도 국정감사에서 "성과급을 장기 이연하고 사고 발생 시 환수하는 제도를 확대하겠다"며 KPI 개편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사실상 '성과가 아닌 통제 성과가 조직 평판과 보상에 영향을 준다'는 새 원칙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원장은 최근 단행한 조직개편에서도 사전예방적 소비자보호에 방점을 찍으면서 잠재 리스크 요인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나설 것을 강조했다.

    해외 금융 감독 기준과도 맞물린다. 미국 연준(FRB)은 CCAR 스트레스테스트 성적에 따라 은행 배당·자사주 환매까지 제한하고, 유럽연합(EU)은 소비자보호·ESG·디지털리스크 대응 역량을 KPI처럼 활용한다. 한국도 사고 후 제재 중심이던 감독 방식에서 공격적 예방형 KPI 체계로 옮겨가는 분기점에 들어섰다는 분석이다.

    은행권은 긴장하는 분위기다. KPI 개편이 현실화되면 성과급 확보가 어려워지고, 사고 한 건이 조직 전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제재가 여신 공급 위축·조직 소극화로 이어지고, 내부통제 지표 관리가 또 다른 '보고 행정'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성과급·승진이 사고 리스크에 달리면 현장 의사결정이 위축될 수 있다"며 "감독당국이 정성평가 권한까지 갖게 되면 통제 중심 경영으로 과도하게 쏠릴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KPI 제도 개편 자체에는 의미가 있다면서도 속도조절 필요성을 조언한다. 사고 발생 뒤 등급 강등·제재 조치만 반복해온 정부의 사후 행정의 한계, 실적 독려 중심의 금융정책 기조도 금융사고를 키운 원인이기 때문이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금융권의) 성과 중심 문화를 개선해야 하지만, 평가비중 급격 확대는 영업위축·리스크 회피영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금감원이 단계 도입·업권 차등 적용을 병행할 경우 연착륙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