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정중헌 논설위원이 쓴 '최민희 방송위 부위원장'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 나온 최민희 방송위원회 부위원장의 표정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대통령이 추천한 이상희 위원장이 건강상 이유로 사퇴해 위원장 직무대행까지 맡은 그는 야당 의원들이 자질 문제를 물고 늘어지자 얼버무리거나 답변을 하지 못했다.

    야당 의원들의 질문은 거칠고 가혹했다. “전문가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냐.” “입법부의 나눠먹기로 들어왔다고 생각지 않느냐.” “전체 업무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양심적으로 말하라.” 최 부위원장의 말대로 “내가 스스로 여기 온 것이 아니다. 임명권자가 종합해 판단했을 것”이라면 그에 대한 인신공격은 임명권자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송 분야를 30여 년간 취재해온 필자가 보기에 의원들의 질문은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 인신공격은 그 순간만 얼버무리면 넘어가 버린다. 정작 곤혹스러운 쪽은 그가 아니라 국민들이다. 한 국가의 정신과 문화를 좌우하는 방송위원회와 국가 기간방송의 책임자를 전문성이나 덕망(德望)이 아니라 정권의 코드인사로 밀어붙이면 방송은 이념의 도구가 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방송 내용은 더욱 제멋대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민희씨는 월간 ‘말’지 기자와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 일을 했을 뿐이다. 시민단체에서 언론을 비판 감시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정도의 일을 한 학자나 평론가는 수백 명에 달한다. 그런데도 그는 열린우리당 추천으로 방송위원이 되고 지금 위원장 직무까지 맡고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그의 행적을 훑어보면 답이 나온다.

    최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때 노 대통령을 옹호하는 성명을 냈다. 방송위원회가 요청하여 한국언론학회가 연구한 탄핵 편파방송 보고서를 심의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편파성이 인정되자 이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그 자리에 오를 충분조건이 되지만, 그의 최대 공적은 이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을 공격하는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방송위원회는 지금 할 일이 태산이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 등 방송환경의 개선도 중요 과제지만 그보다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린 방송의 위상을 어떻게 바로잡느냐가 더 시급하다. 우리처럼 방송이 철학도 규범도 없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케이블과 위성 등 채널이 늘고부터 폭력과 섹스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

    수신료를 걷어가는 공영방송마저 전파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 시청률의 노예가 되어 공·민영 할 것 없이 중요 시간대는 온통 연예인들의 놀이판으로 채워지고 있다. 요즘은 PD까지 가세해 연예가를 중계한다. 쇼 프로그램에서 성기 노출 사건이 일어나고 드라마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때리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방송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공영다운 공영방송 한 채널쯤 바라는 시청자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수수방관 속수무책이다. 대통령부터 방송을 국가 미래의 동력이나 국민정서와 삶의 질(質) 향상을 위한 매체로 보지 않고 출세의 디딤돌 아니면 정권 홍보도구로 여긴다. 방송환경이나 프로그램 개선에는 전혀 뜻도 역량도 없다 보니 자신을 비호해준 비(非)전문인을 방송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이래서는 방송의 독립성은 헛구호가 되고 국민정서는 병들고 만다.

    이상희 위원장의 사퇴로 대통령은 한 달 안에 새 방송위원을 임명해야 한다. 이번만은 방송위 위상에 걸맞은 적임자를 뽑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KBS사장 선임 역시 정권의 나팔수에 더 이상 연연하다가는 부작용이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