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박천일 숙명여대 교수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번 대선의 투표율은 역대 최저치인 63%대를 기록했다. 투표율이 낮았던 이유에 대해 여러 원인 분석이 나오지만 언론, 그중에서도 공영방송의 보도 행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공영방송의 생명은 정치적 독립성과 공정성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 보도 과정에서 우리 공영방송은 그 생명을 많이 잃은 듯하다.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이었던 BBK 의혹 보도와 특검법과 관련해 정치꾼들과 범죄자 김경준씨와 그의 가족이 쏟아 내는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주의주장을 더 흥분해 보도하거나 특정 정파에 편향된 듯한 보도 행태를 확연히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유력 후보자에 대한 음모적이고 흠집 내기식 비방과 험담, 그리고 폭로 정치가 최고의 기승을 부린 이번 대선에서 공영방송은 바로 그 창구 역할을 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런 공영방송의 부정적 대선 보도 행태는 유권자로 하여금 ‘우리 정치 현실은 여전히 상호 증오와 멸시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한다. 이로 인해 정치적 냉소주의가 심화돼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정치 회피 내지는 정치 혐오로 이어지게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 발표된 대선에 관한 여러 연구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언론이 대중에게 이런 중요한 국가적 정치 이벤트를 특정 방향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대중도 정치 이벤트에 나름대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언론이 제공하는 여러 뉴스 보도나 해설을 접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의견을 따르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TV는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강해 영상과 함께 반복적으로 정보를 받다 보면 시청자가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로 믿게 만드는 매체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정부의 과거 국정 운영을 심판하고 미래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에 출마한 정당이나 후보자는 나름의 비전과 정책 방향, 그리고 정치적 리더십을 유권자에게 상세히 전하면서 설득하는 데 초점을 뒀어야 했다. 공영방송이라면 바로 그런 선거의 올바른 지향점과 의제를 선도했어야 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공영방송을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고, 명실상부한 ‘청정지대’로 만드는 데 시급히 국민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08년은 ‘디지털 융합미디어 시대의 원년(元年)’이라는 시대적 의미가 크다. 방송·통신융합기구의 출범과 IPTV 도입 등 새로운 방송 지형이 창출될 전망이고, 이에 걸맞은 미래지향적이고 통합적인 방송 정책의 재정립이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신정부 출범과 동시에 ‘21세기 미디어위원회(가칭)’를 발족시켜 6개월간 한시적으로 운영하여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미디어 산업 청사진을 수립할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정책 변화의 핵심은 세계적 추세에 맞춰 진입 규제 완화, 신문·방송 겸업 허용, 공정 경쟁 보장 등 시장원리에 입각한 규제 최소와 자유화 정책 패러다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추세는 기존의 독과점, 중앙집권적인 방송시장 구조를 경쟁지향적인 방송시장 체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콘텐트 산업과 기기산업 등 유관 산업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시장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시청자의 주권 강화와 이를 위한 방송사의 사회적 책무는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민에 봉사하는 방송 본연의 ‘공익적 가치’는 더욱 보장되고 존속·계승돼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정권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치적 독립성과 공정성을 갖춰 진정한 ‘청정 공영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공영방송의 제도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