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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錫濟(1925~2011) 전 감사원장 별세
5ㆍ16 군사혁명에 참여한 뒤,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총무처장관-감사원장을 지내며, 법령정비와 직업공무원 제도의 확립으로 ‘근대화 혁명’을 뒷받침하였던 憂國과 淸貧의 삶
趙甲濟
朴正熙 소장과 운명적인 만남: “우리 혁명 합시다”
5ㆍ16 군사혁명에 참여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총무처 장관, 감사원장으로서 朴正熙 정권 18년간 늘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李錫濟씨가 86세의 나이로 어제 他界하였다. 빈소는 삼성 서울병원 장례예식장(02-3410-6909), 발인은 3월3일 오전 7시30분, 葬地(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李 원장은 법령정비, 제3공화국 헌법 제정, 직업 공무원 제도 확립, 조국 근대화를 주도한 公職사회 건설이란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현직을 떠나서도 憂國衷情(우국충정)이 서린 글과 회고록을 발표하여 ‘영원한 革命兒’로서의 의무를 다한 분이다.
1925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6ㆍ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연대장과 육군대학 교관을 지냈다.
1960년에, 4ㆍ19 학생혁명이 일어나 李承晩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 李錫濟 중령의 생활은 ‘거지 신세를 겨우 면할 정도’였다.
<군대 월급으로는 네 식구가 보름 정도 버티면 다행이었다. 고급장교가 부대 보급품에서 퍼낸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歸家하는 모습은 어색하지 않은 군 사회의 일반적인 풍속도였다>(李錫濟 회고록)
李 중령은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는 장교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이러한 군에 더 이상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다’면서 考試공부를 시작하는 한편으론 혁명을 꿈꾸었다. 그가 金鍾泌씨의 소개를 받고 대구로 내려가 2군 부사령관 朴正熙 소장을 만난 것은 1961년 초였다.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 만남에 대하여 그는 生前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각하 저는 혁명을 하려고 왔습니다.”
“......”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싶습니다.”
박 장군은 뜨거운 눈빛으로 응대할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는 살인도 정당화되는 게 군대 아닙니까? 외부의 敵이 아니라 내부 모순에 의하여 국가의 기반이 무너져 공산화될 지경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산화는 막아야 합니다. 각하가 우리를 지도해주신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만, 저희를 거부하면 동지들을 규합해서 끝까지 해볼 작정입니다.”
먼동이 틀 때까지 격정을 쏟아놓는 나 앞에서 박 장군은 바위처럼 침묵하였다. 하직인사를 드리고 官舍를 나서려는 순간, 박 장군이 나를 부르더니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이 중령!”
“예”
“우리 혁명합시다.”
순간,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나이 마음은 사나이가 아는 법이다. 그날부터 나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혁명동지이자 충성스런 심복이 되었다. 박정희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5ㆍ16은 의미가 없다. 5ㆍ16은 박정희라는 인간을 역사의 무대에 올려놓기 위한 웅대한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분의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다. 私心 없이 나라를 위하여 일어섰다는 大義名分 때문에 나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때로는 惡役도 마다하지 않았다>
5ㆍ16의 새벽: 한강다리 위에서
李錫濟 중령은 5ㆍ16 군사혁명을 계획하는 데 참여하면서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혁명이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혁명 이후의 국가체제, 혁명정부의 조직, 혁명의 이념, 각종 법령과 제도의 연구’였다. 要職에 기용할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 ‘인사파일’도 만들었다. 혁명이 성공하면 깡패들을 소탕, 민심을 얻는다는 아이디어도 이때 나왔다. ‘국가재건최고회의’란 안은 김종필이 만들고 李錫濟는 이 안을 토대로 최고회의법 초안을 만들었다. 李錫濟는 혁명정부의 국정목표를 ‘국가 근대화’라는 말로 집약하였다.
1961년 5월15일 밤, 李錫濟 중령은 擧事 지휘부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영등포 6관구 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지프차에 혁명정부 운영 계획서 보따리를 싣고 왔다. 도착해보니 거사 정보가 누설되어 진압작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았다. 李 중령은 길가 으쓱한 곳으로 가서 애써 만든 계획서 보따리를 불태워버렸다. 소각된 문서는 중요 정책안, 인사파일, 입법자료, 혁명법령 등이었다. 그는 공직을 떠난 이후에도 “그때 섣불리 자료를 소각한 탓에 혁명과업 수행에 큰 지장을 받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후회막급이다”고 아쉬워했다.
5월16일 새벽, 해병대와 공수부대로 구성된 혁명군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고 北端의 헌병들이 이를 저지하려고 사격할 때 李錫濟는 朴正熙 소장 곁에 있었다. 李 중령은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각하 일이 잘 안 되면 각하 바로 옆 말뚝은 제 것입니다”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朴 소장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응수하였다고 한다.
“사람 목숨이 하나뿐인데, 그렇게 간단히 죽어서 쓰나.”
두 사람은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고 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오는 등 안보가 불안할 때도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朴 대통령은 李錫濟 감사원장을 안심시켜주기 위하여서인지 청와대 상황실로 데려갔다. 대통령은 한 시간 동안 북한군의 배치상황과 우리의 대응전략을 설명하였다. 李錫濟는 그래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각하의 설명을 들어도 안심이 안 됩니다.”
대통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李 원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봐, 문제가 생기면 자네하고 나하고 서울에서 같이 싸우다가 죽으면 되잖아.”
李 원장은 감격해서, “감사합니다. 기꺼이 각하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직업 공무원 제도를 확립하라”
李錫濟 중령은 考試공부를 한 경력이 인정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법사위원장은 대법원, 법무부, 검찰, 혁명재판소, 혁명검찰부, 내각사무처를 관할하였다. 혁명정부의 軍政을 立法으로 뒷받침하면서 그가 맨 첨 한 개혁은 법령정비였다. 사법부와 행정부가, 조선 총독부 관보에 실렸던 일본법과 美 군정 시절에 제정된 영어로 된 법률을 번역도 하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을 때였다. 각 부처에 법무관 제도를 신설, 우리 實情에 맞는 법률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수천 건의 법령이 새로 만들어졌다. 한국 사법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이 군인에 의하여 이뤄졌다.
李錫濟 법사위원장은 부정축재혐의로 감옥에 가 있는 기업인들을 풀어주라는 朴正熙 의장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각하, 그 자들은 좀 더 혼이 나야 합니다. 아직은 풀어줄 때가 아닙니다.”
朴 의장은 이렇게 타일렀다고 한다.
“정권을 잡았으면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총이나 쏘고 대포나 쏴봤지 경제를 해본 경험이 없지 않나. 우리나라는 농사만 지어가지고는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장을 건설해서 실업자를 구제하고, 생산도 하고, 수출을 해야 돼. 경제의 흐름과 속성을 아는 사람들은 기업인들뿐이야.”
李錫濟 법사위원장은, 1962년 12월17일 국민투표에서 80% 이상의 지지를 얻어 확정된 제3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는 데 실무책임자이자 産婆역할을 하였다. 헌법을 기초할 때 그는 미국의 헌법학자도 초청, 자문을 받았다.
1963년 10월 朴正熙 후보가 대통령 선거로 당선되고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을 때 李錫濟는 총무처 장관에 임명되었다. 朴 대통령은 이런 지침을 주었다.
“공무원들이 흔들리면 나라 전체가 흔들립니다. 우리가 국가를 새로 건설하자고 총을 들고 일어섰고 이제 선거를 통하여 정통성을 확보했으니 앞으로 더 잘해야겠소. 흔히들 국가의 3대 支柱가 있다고 하는데, 군대, 공무원, 기업입니다. 이 가운데 공무원은 李 장관이 수고해주어야겠소. 정권이 바뀌어도 신분변동이 없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공무원 제도의 根幹을 정비해주시오.”
李 장관은 ‘직업공무원 제도의 확립’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한다. 李錫濟의 역사적 업적을 정리하면 軍政 시절의 법령정비, 6년여 총무처 장관 시절의 ‘직업공무원 제도 확립에 의한 능률적이고 애국심 있는 공무원像 정립’, 5년여 감사원장 시절의 공직자 紀綱(기강) 확립을 들 수 있다.
정부조직의 기능을 인력관리와 조직관리로 나누고, 부처에 定員제도를 도입하고, 공정한 선발시험으로 人材를 뽑고, ‘공무원 처우 개선 5개년 계획’으로 봉급을 올리고, 공무원 연금제도를 확충하였다. 그는 이런 제도개혁이 쉬웠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당시엔 군의 행정시스템이 정부의 행정을 월등히 앞서 있을 때였으므로 군의 제도를 정부 행정에 적합하도록 법령과 규정을 조금씩만 손을 보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정부 행정 시스템을 걸음마 단계의 기업이 흉내 내면서 오늘과 같은 세계적 기업의 기틀을 닦았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公職은 聖職이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이었다. 月刊朝鮮이 각 부처 중견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통하여 ‘역대 최고 장관’을 뽑았는데, 李錫濟씨가 ‘최고 감사원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기사가 계기가 되어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寄稿(기고)를 싣게 되었다. 現職을 떠난 지 오래이지만, 그 분의 애국충정과 문제의식은 여전하였다. 朴正熙에 대한 충성심도 변함이 없었다. 李錫濟 같은 부하를 둔 朴正熙나, 朴正熙 같은 상관을 둔 李錫濟나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老年의 李錫濟 원장은 가난하게 살았다. ‘淸貧’이란 말이 이분처럼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아주 추운 겨울 밤 서울 강남에서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택시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분은 늘 택시를 이용하였고 나는 지금도 운전을 할 줄 모른다.
두 사람이, 밤거리에서 덜덜 떨면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李錫濟 원장은 굳이 내가 먼저 타야 한다고 하고 나는 나중에 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빈 택시를 여러 대 보내버렸던 기억이 새롭다. 李錫濟 원장의 회고록을 月刊朝鮮에 연재하면서 더욱 그를 잘 알게 되었다. 이분이야말로 박정희의 내면속으로 가장 깊게 들어가 본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다.
두 사람은 겉치레나 쇼를 싫어하고 단도직입적인 말투나 행동이 닮았다. 권력을 잡고서도 특권과 부패를 증오한 反骨정신도 닮았다. 朴 대통령도, 곧은 말을 잘 하는 李錫濟씨가 귀찮고 서운했을지는 모르나 私心이 없다는 점을 믿었고, 국가근대화에 意氣投合한 동지적 관계임을 느꼈을 것이다. 李錫濟는 취재기자들로부터 ‘사색하는 대리석’이란 별명을 얻었다. 老年에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도 만나면 늘 대리석처럼 냉철한 思考와 언어,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義氣(의기)를 유지한 분이다. 퇴직 이후의 깨끗하고 質朴한 사생활까지도 평가 대상에 포함시킨다면 그만한 公私구분과 言行일치는 우리 시대의 드문 사례일 것이다.
그는 언론이나 대중으로부터는 과소평가를 받았으나 5ㆍ16 군사혁명 주체세력 안에선 “朴正熙 시대의 진짜 핵심‘이란 말을 들었다. 권력을 남용한 점이 아니라 권력을 활용한 면에서 그는 한 시대의 실력자였다. 그러한 그가 겨울 밤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행위는 조국을 위한 봉사이다”라고 말하였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公職은 일종의 聖職이다”이라고 했다. 李錫濟 원장은 聖職者의 자세로 조국을 위한 ‘혁명적 봉사’를 修行한 분이고,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助演’이었다. 冥福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