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개입 효과 보름도 못가 … 시장 “장부용 개입 불과”외환보유액 감소 속 물가·국부 감소 우려 확산엔화·달러 지표 악재 겹치며 환율 상단 더 높아져구조 요인 방치 속 물량 개입 반복 한계 드러나
  • 새해 들어 정부의 환율 방어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외환보유액만 빠르게 줄고 환율은 다시 1500원을 향해 치솟고 있다. 연말 정부 개입으로 1430원대까지 눌렸던 환율이 불과 보름 만에 개입 전 수준으로 반납되자, 시장에서는 "장부 맞추기용 개입에 나라 곳간만 비웠다"는 비판이 거세다.

    1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거래일 대비 3.5원 오른 1477.2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연초 이후 10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1480원선 재돌파를 눈앞에 둔 모습이다. 사실상 정부 개입 직전 수준으로 되돌려진 셈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24일 '환율과의 전쟁'을 선언하며 1480원대까지 치솟던 원·달러 환율을 겨냥해 구두 경고와 함께 대규모 달러 매도에 나섰다. 첫날에만 환율이 30원 이상 급락했고, 이어 1420원대까지 미끄러지면서 겉보기엔 '기습 개입'이 성공한 듯한 그림이 연출됐다. 연말 환율이 낮아지면 달러 부채를 들고 있는 기업·금융사의 재무제표상 부채 규모가 줄어드는 만큼, 장부상 건전성을 관리하기 위한 의도가 짙게 읽혔다는 평가다.

    하지만 그 효과는 '연말 쇼'에 그치고 말았다. 새해 첫 개장일인 1월 2일 환율은 1440원대로 소폭 반등한 뒤, 장이 열리는 날마다 계단식 상승을 이어가며 최근 장중 1470원선을 다시 돌파했다. 연말 전면 개입으로 어렵게 끌어내린 구간이 채 2주도 안 돼 무너진 셈이다. 

    시장 변수도 정부의 방어를 압도하는 흐름을 보였다. 엔·달러 환율은 일본 총선 가능성과 재정 불안,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지연 전망 속에 159엔대까지 치솟으며 엔화 약세가 심화됐다. 최근 원화는 엔화 약세와 연동되는 모습을 보이며 원·엔 재정환율도 100엔당 928원대로 상승했다. 뉴욕 증시 조정과 달러인덱스 반등도 원화에 추가 약세 압력을 더했다.

    한국 경제의 체력 지표 중 하나인 외환보유액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외환보유액은 11월 말 4306억 달러에서 12월 말 4280억 달러로 한 달 만에 26억 달러 감소한 것. 특히 감소 폭은 IMF 외환위기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연말 경상수지 흑자를 감안하면 실제 시장 투입 물량은 이보다 컸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취임 이후 누적으로는 400억 달러 이상 외환보유액이 증발했다는 지적도 있다.
  • ▲ ⓒ뉴데일리
    ▲ ⓒ뉴데일리
    환율 상승은 물가에도 곧바로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12월 수입물가가 전월 대비 0.7% 오르며 6개월 연속 상승했다. 국제유가는 하락했지만 원화 약세가 비용을 밀어 올렸다. 수입물가는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물가지표 부담은 1분기부터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외환보유액을 이렇게 써가면서 지켜낸 것이 무엇이냐는 냉소가 나오고 있다. 고점 근처에서 달러를 내다 팔아 원화를 받아놓은 상태에서 환율이 다시 뛰면, 훗날 보유고를 복원하기 위해 더 비싼 값에 달러를 사와야 한다. 이는 곧 한국은행의 환차손, 나아가 국가 재무 부담으로 직결된다. 국민연금의 환헤지 확대, 한은–국민연금 간 외환 스와프 등도 향후 환율 경로에 따라 잠재 손실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당국의 설명은 여전히 '대외 여건 탓'으로 일관하고 있다. 달러 강세, 엔화 약세, 글로벌 금리 불확실성 등 외부 변수가 고환율의 주된 원인이라는 논리다. 문제는 최근 달러인덱스 변동 폭에 비해 원·달러 환율의 상승 폭은 훨씬 가팔랐다. 미·한 금리 역전 장기화, 과도한 통화 공급, 만성 재정적자, 대미 대규모 투자 약속에 따른 달러 유출 기대 등 한국 경제 고유의 구조적 취약성이 환율을 떠받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환율 개입을 두고 "기침은 줄였지만 폐는 더 상하게 만든 처방"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한 시중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외환보유액은 진짜 위기 때 꺼내 쓰라고 쌓아둔 비상금이지, 연말 재무제표 숫자를 다듬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며 "금리·재정·통화·대외투자 구조에 손대지 않은 채 물량 개입만 반복하면 외환보유액과 정책 신뢰를 동시에 소진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IB는 올해 한국의 1인당 GDP가 대만에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면서 "환율이 국부 평가에 직접 영향을 주는 단계"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정부는 추가 대응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나, 시장에서는 "개입 여력·명분·효과를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난도가 더 높아졌다"는 회의론이 우세하다.

    전문가들 역시 외환보유액을 통한 단기 시세 누르기가 더는 유효한 방식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과의 금리 역전 지속, 재정 수지 악화, 통화량 증가, 해외 대규모 투자 이행 등 구조적 달러 유출 요인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물량 개입만 반복할 경우 환차손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학계 한 교수는 "고환율과 외환보유액 감소가 동시에 이어질 경우 수입물가 상승, 실질소득 감소, 자산가치 하락, 1인당 국민소득 역전 등 '조용한 국부 유출'이 가속화될 수 있다"며 "숫자 맞추기식 단기 개입으로는 더 이상 시장을 설득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