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한국 대통령-대통령 후보들의 이념해체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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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北일본인이 중계한 김대중-김정일 회담
북한정권은 대통령과 대통령감의 이념해체를 노린다.
趙甲濟
북한정권은 역대 한국의 대통령과 대통령감을 상대로 한 공작을 계속해왔다. 그들은 朴正熙 대통령을 죽이기 위한 세 번의 시도 끝에 陸英修 여사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全斗煥 대통령에 대한 金正日의 암살지령으로 17명의 장관급 엘리트가 죽었다.
북한정권은 물리적으로 대통령을 제거하는 방법과 함께 이념적으로 去勢시키는 공작을 폈다.
북한은 1973년 도쿄에서 한민통 조직을 조종하여 金大中씨를 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했다. 2000년엔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를 앞세워 노벨평화상에 집착하던 김대중을 유혹, 제1차 평양회담을 成事시키고 반역면허증인 6.15 선언을 만들어냈다. 김대중 대통령이 친북 일본인의 중계로 김정일과 만났다는 것은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아래 이익치, 정몽헌 진술서에도 나오지만 요시다는 제1차 평양회담을 준비한 싱가포르 비밀접촉 때도 남한측 대표단과 同行, 同席하였다. 좌파들은 남북관계를 '민족문제'라고 미화하는데 민족문제에 왜 親北 일본인 도움을 받나?
<정몽헌 특검 진술서 중: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저희의 대북사업을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긴장완화가 필요하였으며,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남북간 정상회담의 개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서, 1999. 12월 말경 1998년부터 대북사업을 위해 북측과 접촉을 하였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에게 우리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였으며, 이익치 회장이 한국계 일본인 요시다의 중개로 다시 북측의 아태 부위원장 송호경과 접촉을 하였으며,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북측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2000. 1월초경 제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을 서울 중구 소공동 소재 롯데호텔에서 만나서 “이번에 북측에 남북간 정상회담을 개최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해 보니 저쪽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박장관이 즉석에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북한정권의 對南공작 담당이던 김용순은 1993년에 일본 아사히 신문기자 고바야시 게이지의 중계로 金泳三 대통령 당선자에게 “취임 연설문을 민족적 관점에서 써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를 받아들인 金泳三은 취임연설에 이런 대목을 끼워 넣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 다 주지 못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도 같은 민족인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고,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 다 주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이 대목은 金日成의 말을 金泳三이 대신 해준 격이다.
이때부터 金泳三 대통령의 머리 속으로 좌경적 민족주의가 들어가 정책화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전면적 부정, 보수층 공격, 중앙청 철거, 소위 역사바로세우기에 따른 12.12 사건과 광주사태 재수사, 全斗煥-盧泰愚 구속, 보수분열 등등. 연설문 공작은 성공한 셈이다. 金日成은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카터에게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연설을 듣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감동’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李明博 대통령이 취임연설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이념을 떠난 실용’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북한의 공작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면적인 좌경화 흐름에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인다. 대통령 주변엔 ‘이념적 기회주의자’로 분류될 사람들이 많다. 애국시민들의 국가보안법死守투쟁을 공개적으로 경멸한 인물도 있다. 李 대통령의 ‘이념을 떠난 실용’은 친북좌익과 싸우지 않으려는 자세로 해석되었다. 이것이 좌파선동세력에 역습의 기회를 준 것이다.
朴槿惠씨도 2002년에 李會昌 당시 총재에 반발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북한에 가서 김정일을 만나고 왔다. 그 후 朴 의원은 金正日을 비판하지 않는다. 김정일 비판 없는 북한 정권 비판은 논리상 불가능하다. 그의 訪北에 김정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이 무슨 목적으로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더 조사해봐야 할 대목이지만, 朴 의원의 反共자세는 訪北 이후 거의 중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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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치 현대정권 회장의 검찰 진술 중 요시다 관련.
문 : 진술인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준비과정에도 관여를 하였던 사실이 있나요.
답 : 제가 관여를 하였던 것은 아니고, 현대가 대북경협사업을 재개하여 추진하면서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10여년간 중단되었던 사실이 있는데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햇볕정책을 추진하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면 정부의 정책에도 도움이 되고, 앞으로 현대가 추진하는 대북경협사업에도 정부의 지원을 원활하게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200. 1경 정몽헌 회장이 일본인 요시다를 통하여 북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더니 북측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는 연락을 받고, 정몽헌 회장이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던 박지원을 통하여 대통령에게 그 뜻을 전달하여 승낙을 받았는데, 정부측의 협상창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현대에서는 북한에 관광사업을 추진하는데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였고, 박지원이 장관으로 있던 문화관광부 소관업무가 많아서 앞으로 도움을 기대하고 박장관에게 정부측의 협상창구를 박장관으로 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박장관이 대통령의 승낙으로 대북특사로 임명되는 등 정상회담 준비를 총괄하게 되었던 것이고, 준비과정에 박장관이 정몽헌 회장과 같이 북측 인사와 접촉할 때 제가 정몽헌 회장을 수행하였던 일은 있습니다만 제가 정상회담 준비 등에 관여를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문 : 진술인이 정몽헌을 수행하여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준비한 일시, 장소 및 과정 등은 어떠한가요.
답 : 2000. 3. 8. 제가 정몽헌 회장을 수행하고 싱가폴에 갔는데, 남측에서는 박장관과 국정원의 김보현 국장, 북측에서는 위 송호경 부위원장과 한명이 더 나와서 정몽헌 회장이 인사를 시키고, 앞으로 다시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관련하여 협의하기로 하였고, 같은 해 3. 16.∼3. 23. 상해와 북경에서 제가 정몽헌 회장을 수행하고 갔을 때 남측에서는 박장관, 김보현 국장, 북측에서는 송호경 부위원장이 다시 만나서 정상회담개최협의를 하였는데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고, 같은 해 3. 29. 북경에서 다시 만났다가 같은 해 4. 8. 북경에서 만나 결국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하는 협약을 체결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고, 저는 매번 정몽헌 회장을 수행하였는데 회담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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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에 대한 특검 진술 조서 중 요시다 관련
문 : 현대가 대북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를 추진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 예,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문 : 남북정상회담개최 추진을 위한 이야기는 언제부터 나오게 되는가요.
답 : 1999. 12월말경 처음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문 : 남북정상회담개최 추진은 정부측의 의견이 반영된 것인가요.
답 : 아닙니다. 저희쪽이 먼저 북측에 의사를 타진하였던 것입니다.
문 : 정부측의 제의도 없었는데, 현대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가요.
답 : 1999. 12월 하순경 서울에서 남북농구대회가 성공리에 개최되었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취임시부터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시면서 언제라도 남북정상회담에 응할 수 있다는 말씀을 여러 자리에서 하셨고,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남북관계의 긴장완화가 이루어질 경우 저희가 추진 중이던 대북사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남북정상회담성사 가능성을 저희쪽이 타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 : (판독불능)
답 : 그 당시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이 담당을 하였습니다.
문 : 현대측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게 된 경위는 어떤가요.
답 :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저희의 대북사업을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긴장완화가 필요하였으며,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남북간 정상회담의 개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서, 1999. 12월 말경 1998년부터 대북사업을 위해 북측과 접촉을 하였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에게 우리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였으며, 이익치 회장이 한국계 일본인 요시다의 중개로 다시 북측의 아태 부위원장 송호경과 접촉을 하였으며,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북측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문 : 이 내용에 대하여 정부측에 의사를 전달되었는가요.
답 : 2000. 1월초경 제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을 서울 중구 소공동 소재 롯데호텔에서 만나서 “이번에 북측에 남북간 정상회담을 개최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해 보니 저쪽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박장관이 즉석에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문 :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요.
답 : (판독불능)말씀드린 것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박장관이 ‘한번 추진해 보라‘고 하여, 제가 “이 일은 누가 맡으시겠습니까“라고 하니까, 박장관께서 ‘이 일은 내가 맡기로 했다‘라고 하여, 제가 “그럼 일정을 다시 확인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 :2000. 1월 하순경에 박지원 장관으로부터 정부측의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한 공식입장을 전달받은 것으로 보면 되는가요.
답 : 예, 그렇습니다.
문 : 정부로부터 남북정상회담개최 문제를 추진하라는 입장을 확인한 후에 어떻게 하였는가요.
답 : 제가 다시 이익치 회장에게 북측에 연락을 해서 이쪽에서도 좋다고 하니까 남북간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지시를 하였으며, 저쪽(북측)에 날짜와 장소를 확인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문 :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요.
답 : 2000. 3월초에 김대중 대통령 유럽순방을 수행하기 위해서 제가 프랑스에 가 있을 때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북측에서 3. 9. 싱가포르에서 남북당국자간 예비접촉을 갖기로 하자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문 : 남북당국자간 접촉을 갖자는 제의에 대하여 정부측에 어떻게 전달이 되었는가요.
답 : 제가 이익치 회장에게 박장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문 : 이익치 회장도 남북정상회담추진에 대하여 피의자와 박지원 장관이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요.
답 : 아, 예. 이익치 회장에게도 정부측에서 박지원 장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하기로 했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문 :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하여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을 만나서 이 문제를 협의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가요.
답 : 저희 대북사업의 주관부서는 통일부였지만 금강산관광사업과 관련하여 박지원 장관을 접촉할 기회가 자주 있었고, 박 장관이 당시 정부의 실세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국민 누구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장관에게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 : 박지원 장관 이외에 다른 정부관계자와 이 내용을 협의한 사실이 있었는가요.
답 : 박지원 장관 이외의 다른 정부관계자와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판독불능)
문 : 박지원 장관에게 북측이 정상회담 협의에 응할 의향이 있다는 보고를 한 이후, 국정원 또는 정부기관으로부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문의를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 없습니다.
문 : 남북당국자간 첫 접촉이 이루어진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답 : 2000. 3. 9. 싱가포르에서 남북당국자간 예비접촉이 처음 이루어졌습니다.
문 : 예비접촉을 하자는 통보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받았는가요.
답 : 2000. 2월 하순경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북측이 2000. 3. 9. 싱가포르에서 접촉을 갖자는 제의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제가 바로 박지원 장관께 그 사실을 알려드렸으며, 박지원 장관께서 그 날짜에 접촉을 하기로 하였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문 : 피의자는 전회 진술에서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유럽순방을 위해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3월초경 이익치로부터 예비접촉을 갖자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였었는데, 금일은 그 이전에 예비접촉 통보를 받았다는 말인가요.
답 : 제가 프랑스에서 싱가포르로 직접 갔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 이익치 회장과 박지원 장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판독불능) 있었던 것으로 보아 2월 하순경 예비접촉 통보를 받은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문 :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당국자간 접촉은 모두 몇 차례나 이루어졌는가요.
답 : 2000. 3. 9. 싱가포르에서 예비접촉이 있었으며, 같은 달 17~18.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제1차 회담, 같은 달 23. 중국 베이징에서 제2차 회담, 4. 8. 중국 베이징에서 제3차 회담까지 모두 4차례의 접촉이 있었습니다.
문 : 남북당국자간 접촉시에 현대측도 함께 참여를한 것인가요.
답 : 예비접촉과 1차 회담에서는 제가 양쪽을 소개해 주고, 끝날 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으며, 남북당국자간 회담이 끝난 이후에 저희측과 북측간에 별도로 만나서 협상을 하였으며, 남북당국자와 현대측 3자가 동시에 회담에 참석한 적은 없었습니다.
문 : 북측과의 4차례의 협상시 현대측은 누가 참여를 하였는가요.
답 : 예, 저와 이익치 회장이 4차례 접촉이 있을 때마다 참석을 하였습니다.
문 : 2000. 3. 9. 남북당국자간 예비접촉이 이루어졌는가요.
답 : (판독불능) 예비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문 :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당국자간 예비접촉이 이루어진 과정은 어떤가요.
답 : 저는 대통령 유럽순방길에 프랑스까지만 수행을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2000. 3. 9. 싱가포르에서의 예비접촉을 위해서 3. 8. 프랑스에서 싱가포르로 저 혼자 이동하여 이익치 회장, 요시다와 합류를 하였고, 다음날 리츠칼튼호텔에서 남북당국자간 예비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와 이익치 회장, 요시다가 참석하여 양측을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도록 하는 정도에서 일단 저희는 물러나왔습니다.
문 : 예비접촉에 참석하였던 사람은 어떠하였는가요.
답 : 현대측에서는 저와 이익치 회장, 요시다가 참석하였고, 남측에서는 박지원 장관, 국정원 김보현 5국장이, 북측에서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 황철 참사가 예비접촉 장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측과 북측에서 수행원 2명 정도씩이 왔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양쪽을 소개하는 자리에는 수행원들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