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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대학을 힘들게 졸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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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탄때 이승만은 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1905년 2월에 30세의 나이로 조지 워싱턴 대학 콜럼비안 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배재학당의 학력을 초급대학 과정으로 인정받아 2학년 2학기에 편입되었다.
입학은 워싱턴의 카베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서울의 장로교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 목사의 소개장을 통해 햄린 목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대학에서 등록금은 면제받았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여러 도시의 YMCA와 교회를 돌면서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내용은 한국인의 풍습과 그것에 적응하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인기가 있어서 <워싱턴 포스트> 등 여러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1905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3년 동안에 그는 110회의 강연을 했다. 그만큼 그의 영어는 유창해졌다.
그러나 미국인 청중은 대부분 일본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욕을 이해시키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미국인들과 다투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감리교계 실력자로 <크리스천 애드보켓>지의 편집인인 레오나드 박사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동양 순방을 마치고 온 레오나드 박사는 뉴저지 주의 오션그로브 강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그 연설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잡지에 실린 내용을 읽고 분개했다. 그리고는 길게 항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애즈버리파크의 <프레스>, 뉴어크의 <모닝 스타>같은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그를 격렬히 비판했다.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2년 반 공부하는 동안에 이승만은 주로 교양과목을 들었는 데, 특히 유럽사와 미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서양인들이 어떻게 해서 문명개화(文明開化)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대학에서 이승만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강연으로 시간과 정력을 많이 빼앗긴 데다가,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용만을 통해 한국에서 데려온 그의 어린 아들 봉수(태산)를 돌보는 것도 큰 문제였다.
아들을 돌 볼 수가 없어서 필라델피아의 미국인 가정에 맡겼다. 하지만 아들은 1905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이승만은 아들의 죽음도 지켜 보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1907년 6월 5일에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 계속 관심을 보여온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는 졸업식에서 이승만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스티븐스 암살사건으로 하버드 대학을 떠나게 되다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이승만이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에 헌신하기를 바랬다.
이승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누구 보다도 서울의 아버지가 맹렬히 반대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감옥에 갈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5년 7개월을 감옥에 있어야 했던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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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1907년 9월에 하버드 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주변의 미국인들 가운데는 그 대학이 너무 진보적이고 세속적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버드에서 그는 미국사와 유럽사를 전공했다. 강연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전념했다. 그 때문에 그는 1년 안에 석사 학위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끝내고 논문 제출만 남겨두게 되었다.
그때 학업을 중단시키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교포 장인환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찬양하고 다니던 미국인 D. W.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임명한 친일적 인물로서 시오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잘 모르는 미국인 대중은 그 사건을 단순하게 살인 사건으로만 보았다. 그 때문에 한국인은 폭력을 좋아하는 테러리스트 민족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미국인들의 편견은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더욱더 굳어졌다.
그러한 편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이승만이었다. 스티븐스 암살 사건 이후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이 나빠짐에 따라, 지도교수는 그의 면담 요청마저 거절했다.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관한 논문을 써서 조교에게 제출했지만, 지도교수로부터는 심사에 관해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버드 사회에서 이승만은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외톨이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연을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대외 활동을 중지했다. 강연장에서도 미국인 청중들이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를 떠났다. 나중에 그는 결국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10년 2월에 가서였다. -
덴버에서 한인 애국동지 대표자대회를 열다
절망 상태에서 방황하던 이승만은 우선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한국인들을 단합시키는 일을 해보고자 했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그는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와 함께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한인애국동지대표자대회(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를 열었다.
모두 36명이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멀리 상해, 런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회는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소수의 동포들이 모여 보았자 망국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쓰러져 가는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자는 애국심으로만 이루어진 모임일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그 지방의 신문인 <덴버 리퍼블리칸>이 그 모임에 대해 보도를 해주고, 스탠포드 대학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 박사등 한국인들에 동정적인 소수의 미국인들이 격려차 참석해 준 사실이었다.
대회는 조국의 독립 유지를 위해 해외 한인들의 힘을 모으자는 원론적인 결의로 끝났다. 그리고는 첫 사업으로 고국의 동포들에게 세계 정세를 알려 줄 책자를 발간할 출판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폐회사에서 의장인 이승만은 한민족이 일본에 의해 결코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한국인들은 4천 년 이상 독립을 유지해온 강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대회가 끝난지 며칠 뒤에 이승만은 영국으로부터 한 통의 격려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영국의 신문기자로서 대한제국 말기에 조선에 체류하면서 <한국의 비극>을 쓴 프레데릭 맥켄지였다. 그는 강대국들 틈에서 주권을 빼앗겨 가는 “불쌍한” 한국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려고 애를 썼던 친한파 인사였다.
편지는 덴버 대회 초청장을 받았지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인들은 망국의 불행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부강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이었다.
한국사회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기독교(개신교)로 개종하고 있으므로 기독교를 통해 서양의 선진문명을 제일 먼저 받아들여 근대화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