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즈벨트의 ‘부자 때리기’는 실패했다 
    버튼 폴섬의 <‘뉴딜’이냐 ‘로딜’이냐?>를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  globaljune@gmail.com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2002년 봄 서울역 앞 계단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말 그대로 선남선녀들이었다. 특히 20대 젊은이들을 보면서 인종 개량이 이뤄졌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결같이 키가 크고 미남 미녀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이었다. 영양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필자가 생각하는 노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91년 서울을 떠나 2002년 귀국할 때까지 러시아를 생활기반으로 삼아 체첸, 아프가니스탄, 다게스탄 등과 같은 내전지역을 돌아다닌 필자에게 대한민국의 노숙자는 너무나 깨끗하고 부유하게(?) 느껴졌다.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깡마르고, 이(lice)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중앙아시아의 노숙자들과 달리, 비교적 건강하고 청결하게 보였던 것이다. 아니 이들이 굶어 죽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필자에겐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필자의 표현에 분노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노숙자가 굶어 죽지 않는 사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10여년 만의 귀국, 대한민국에서 ‘천국’을 보다

    지옥(?)을 경험해 본 필자에게 10여년 만에 돌아온 대한민국의 모습은 천국처럼 느껴졌다.
    70억 세계 인구 가운데,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이 보장되는 사회에 사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우리는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에서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비정상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구 비율로 따질 때, 기본 인권과 경제적 안정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소수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비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풍요를 누리고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부 선진국가들의 국민들이 비정상적(?)으로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전기 부족으로 정전사태를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2002년 한 보수 일간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면서, 그 증거의 하나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도시는 4군데 밖에 없다”고 보도한 것이었다.

    4군데 밖에?! 2001년 필자가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하던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도시는 카불과 칸다하르 2곳뿐이었다.

    그나마 하루에 몇 시간만 제공되고 있어, 직접 가져온 소형 자가 발전기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항상 전기가 있는 곳에서 생활해 온 한국 기자에게 전기가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2001년 11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로 들어갈 때 갑자기 독일 방송기자가 외쳤다. “전기다!” 우리 일행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보고 황홀해 했다. 전기불이 들어온 도시를 본 지가 얼마나 됐던가? 옆에 있던 체코 여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수도도 있을까?” 이 여기자의 기대는 허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여기자는 러시아 비상사태부 기지 덕분에 샤워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러시아 기지를 방문하자, 기지 사령관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이때 여기자들이 일제히 “샤워”라고 외쳤으며, 이들의 소원은 이뤄졌다. 다 큰 처녀들이 주변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카불에서 생활하자니, 현지 화폐도 필요했다. 현지 안내원은 무장 경호원과 함께 카불 시내로 환전하려 나갔다. 그리고 돈을 자루에 담아 돌아왔다. 돈을 세기도 힘들었다. 그냥 100장을 세어서 묶은 다음, 그 묶음 높이가 되는 양의 돈을 100장으로 간주해 묶은 것이었다.(어릴 때 딱지치기 추억이 되살아났다. 오차는 2-3장 정도였고, 그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화폐가 여러 종류 있었던 사실이다. 공식(?) 화폐 ‘아프가니’는 이른바 ‘도스툼 아프가니’와 1대 10으로 교환되고 있었다. 이 두 화폐는 얼핏 보면 구별이 되지 않는다. 똑 같은 인쇄기로 찍은 것이다.

    그러나 종이 질이 다르다.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라시드 도스툼이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에서 화폐 제조기를 탈취, 화폐를 대량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질의 종이를 확보하지 못했던 것.

    대공황의 진짜 원인은?

    최근 대한민국 경제위기설이 대두되고 있다. 남부유럽 경제위기가 남의 일이 아니며, 잘해도 ‘일본형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읽는 <뉴딜이냐 로딜이냐>는 필자의 경제상식(?)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로딜(Raw Deal)이란 ‘부당한 대우’를 뜻하는 말로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비꼬기 위해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대비시킨 것이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으로 대공황이 발생했으며, 이는 ‘뉴딜정책’에 의해 극복됐다”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러나 저자는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공황은 첫째,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 둘째 ‘스무트-할리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에 의한 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셋째, 연방준비제도(the Federal Reserve)의 고이자(high interest)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뉴딜’에 의해 대공황이 극복된 것이 아니라, 지연 악화됐으며,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극복됐다는 것이다. 특히 루즈벨트의 ‘부자 때리기’가 대중 인기 영합을 통한 정치적 자산 늘리기에는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대실패였으며, 미국의 경제회복은 루즈벨트가 죽은 뒤, ‘부자들의 투자심리’가 회복되면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즉 대공황은 자본주의 모순 덕분이 아니라, 정치의 무능한 경제개입과 대중인기주의 때문에 발생하고, 또 심화됐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의문은 ‘그럼 한국은?’이었다. (미래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