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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보통예금과 저축예금은 단연 은행권의 효자였다. 수시입출금이 잦다보니 이자를 적게 주거나 거의 주지 않아도 탈이 없었다. '귀차니즘'에 빠진 충성고객들은 어지간하면 은행을 바꾸지도 않았다.
은행 입장에서는 앉은 자리에서 따박따박 수수료만 받고 조달비용은 거의 들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내 돈이지만 내 돈이 아닌 듯 엉뚱하게 은행권 배만 불리던 이런 결제성 예금 규모가 자그만치 220조가 넘는다. 총예금의 22%로 해마다 10% 내외씩 쑥쑥 성장했다.
하지만 은행의 호시절은 끝났다. 금융위원회가 금융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은행권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계좌이동제'를 꺼내 들었다.
계좌이동제란 고객이 주거래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옮기면 기존 계좌에 연결된 카드 대금이나 각종 공과금 자동이체 등을 은행이 책임지고 새 계좌로 이전하는 제도다.
이제까지는 주거래 은행을 바꾸기가 어려워 고객이 한 번 거래하기 시작하면 변화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고객이 은행 간 상품이나 서비스를 비교해서 쉽게 거래 은행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은행들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현재보다 한 차원 높은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
10월말 본격 시행예정이니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쇼핑하듯 은행 상품이나 서비스를 비교한 뒤 간단한 클릭으로 주거래 은행을 바꿀 수 있다.
다급해진 은행들은 수수료 인하-금리 우대-포인트 적립 등을 앞세워 집토끼를 잡아놓기 위해 벌써부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수억원대 이상의 예금자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은행이 5000만원 예금자의 자산운용도 해주겠다고 나선다. 룰루랄라 고객전성시대다.
저금리 시대의 한계상황을 고려하면 초기 계좌이동제는 미풍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무한경쟁'의 무서운 함의를 담고 있다. 트렌드를 읽지 못해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도태될 수 있다. 은행들이 경계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지난 4월 서울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최근 3년간 주거래은행을 변경했거나 향후 교체할 뜻이 있다는 응답이 절반이 넘는 51.2%에 달했다. 나머지 절반도 가까운 영업점이 없거나, 바빠서 은행에 갈 시간이 안 나거나, 자동이체 항목을 모두 변경하려니 번거로워서 였다고 응답했다. 대규모 머니 무브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
현재 이 부문은 KB국민은행이 점유율 23%로 절대 강자다. 신한은행(13.6%), 우리은행(12.9%), NH농협(12.2%) 등이 뒤를 쫓고 있지만 아직은 거리가 있다. 그동안 은행 간 시장점유율의 변화는 1%포인트 내외에 그칠 정도로 매우 비경쟁적인 시장이었다. 그러나 고객들이 거래은행을 바꾸기 시작할 경우 이 순위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벌써부터 은행가는 전운이 감돈다.
선제 대응에 나선 곳은 우리은행이다. 3월에 '주거래 상품 패키지'를 내놓은 후 6개월 만에 83만 계좌를 돌파했다. 신한은행은 '주거래 우대통장'과 '주거래 우대적금'으로 맞서며 두 달여만에 30만 계좌를 유치했다.
하나은행은 '행복 주거래 우대' 통장을 통해 127만 계좌를 유치하며 선전하고 있다. 기업은행과 농협은행도 '평생 통장'과 'NH주거래 패키지'로 맞서고 있다.
수성에 골몰하는 KB금융은 'KB국민ONE통장' 출시를 통해 40일 만인 지난 9일 현재 17만543개 계좌를 유치했다. 나머지 은행들도 고객 눈높이에 맞춘 맞춤형 상품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신경전이 치열하다 보니 은행간 보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
이런 가운데 은행의 고민은 또 있다. '충성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비가격 경쟁이 그것이다.
고객별 자산규모, 가입상품, 이용실적뿐만 아니라 금융소비 행태 분석 등에 기반을 둔 고객별 맞춤형 서비스 제공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가뜩이나 수익성 악화로 고민하는 은행들 입장에서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디 이것 뿐이랴.
추석 연휴가 끝나면 기존 은행권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인터넷은행 출범이 기다리고 있다. 내년부터는 만능통장으로 불리는 ISA까지 도입돼 업역간 칸막이도 사라진다. 짭짤한 수수료 수입을 올리던 외환이체업도 개방되고 여기에 떨어진 집값과 대출금의 차액을 고스란히 떠안는 비소구대출까지 더해진다.
바야흐로 은행권의 '고난의 행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