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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홀릭] 이대로 묻히고 마는가. 우리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져갔던 사건. 그 끔찍했던 사건은 12년이란 세월이 흘러 2009년 영화로 다시 재생된다. 그리고는 이 작은 영화가 법이 묻어버린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실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국민들의 재수사 요구와 2012년 패터슨의 한국 송환이 결정되며 봉쇄돼 버린 진실이 세상에 제대로 밝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렇듯 영화의 사회적 참여는 상상했던 것 이상의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1997년 4월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씨(당시 22세)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살인사건의 강력한 용의자이자 목격자는 바로 에드워드 리(36세)와 아더 패터슨(36세). 결국 에드워드 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검찰의 재수사를 받던 패터슨은 출국금지가 잠시 풀린 틈을 타 1999년 미국으로 도주해 사건의 진위여부는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 했다. 하지만 진실의 힘은 시간을 뛰어넘는 법. 도주 16년 만에 한국으로 송환된 패터슨. 과연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사건’이란 오명을 벗어낼 수 있을까?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8년만인 2015년, 이태원 살인사건은 우리에게 그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렇게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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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유흥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클럽의 모습, 두 남자의 발걸음, 화장실에서 영문도 모른채 무참히 피살된 한 청년, 청년이 흘리는 피는 이내 하수구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증거와 진실까지 집어삼킨 채. 이는 마치 극악무도한 살인죄가 죄 없음이 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듯 영화의 프롤로그는 이 사건의 모든 것을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단지 재미삼아 벌인 살인사건은 화면가득 번지는 피비린내 보다 더 악랄하고 참혹한 모습이다.
용의자이자 목격자인 두 사람이 벌이는 진실게임.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로 교차해서 보여지는 이들의 두 눈에는 진실로 위장된 거짓이 교묘하게 공존한다. 단지 자신은 목격자일 뿐, 살인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키는 두 사람. 진술은 번복되고, 판결 또한 번복된다. 결국 죄 있는 자들이 자유로워지면서 고통은 오직 유족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고 만다. 사건 담당 검사나 변론을 담당했던 변호사조차 자신들의 주장을 스스로 의심하는 상황. 과연 누가 진범일까?
사건이 있었던 햄버거 가게를 다시 찾은 검사. 모두의 기억에서 지우려는 듯 이제는 폐쇄돼 버린 화장실, 하지만 그 곳에는 난자당해 피범벅이 된 채 죽어있는 한 청년이 여전히 어둠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의 죽음과 진실이 함께 봉쇄되어 버린 공간, 작품은 픽션임을 강조하며 시작했지만 결코 픽션일 수 없는 현실로 끝을 맺는다.
영화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열린 결말을 취하고 있다. 누가 진짜 범인인지의 판단여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2015년 우리가 다시 마주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결코 열린 결말이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50퍼센트의 확률게임조차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했던 검찰의 무능함은 지금에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여러 난관이 예측되는 상황이기는 하나 이제라도 법이 그 소명을 다해야 할 때다.
진실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제대로 밝혀져 무고하게 살해당한 故 조중필씨가 이제라도 편히 잠들 수 있기를, 유족들이 받았을 긴 고통의 시간이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화평론가 권 상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