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 방지 대책' 합의안 잉크도 안 말랐는데… 반도체 직업병 의심환자 '묵살'건축법상 '공개공지' 무단 사용 '불법'…"가대위 잃고 명분도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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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서울 강남역 주변, 반올림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최종희 기자.
반올림이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완성한 반도체 직업병 의심환자들과의 약속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는 17일 오전 서울 강남역 주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직업병 의심환자에 대한 조건 없는 보상 ▲진정성 있는 사과 ▲재발 방지 대책을 삼성에 요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재발 방지 대책의 경우 올해 초 반올림을 포함한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와 삼성전자 등 3개 교섭주체가 이미 합의안에 사인을 한 부분이다.
당시 합의안에는 외부 독립기구인 '옴브즈만 위원회'를 설립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위원장에는 서울대학교 이철수 법과대학 교수가 임명됐다.
옴브즈만 위원회는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한 전권을 손에 쥐었다. 가대위와 반올림, 삼성은 옴브즈만 위원회 활동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반올림은 이날 이 같은 합의안을 무시한 채 삼성에 사고 예방책을 내놓으라는 식의 이율배반적 생떼를 부렸다.
합의안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반올림이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꾼 셈이다.
직업병 논란은 지난 2007년 황상기 씨가 사망한 딸(삼성전자 퇴직자)을 대신해 산업재해 신청을 하고 피해보상을 주장하면서 사회적 쟁점이 됐다.
이후 교섭단체 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8년을 끌어오다 올해 초 극적으로 갈등이 풀렸다. 유가족 8명이 모여 만든 가대위가 삼성과의 직접 협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가대위도 원래는 반올림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반올림 조직 구조가 유가족 중심이 아닌 활동가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발을 빼고 나와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러다 지난해 9월 삼성이 꾸린 보상위원회에 참가키로 결정했다. 직업병 의심환자들이 모두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겠다는 취지였다.
보상위원회를 통해 같은 해 12월 말까지 100여명이 넘는 직업병 의심환자들이 보상금을 타갔다.
반도체 공장과 직업병 사이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어디에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성은 협력사 퇴직자들까지 보상 대상에 포함시켜 돈을 지급하고 사과를 했다.
그러나 반올림은 집회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가대위의 이탈로 진작에 시위 명분을 잃었지만 멈출 기색이 없다. 삼성본관 앞에서 지금까지 200일 넘게 노숙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하지만 이번 농성이 사유재산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반올림의 농성장 자리는 현재 건축법상 '공개공지'로 지정돼 있다.
공개공지로 정해진 땅에는 건축법에 따라 적재물을 쌓아둘 수 없다. 시민들이 오가는 데 거치적거리는 울타리와 같은 물건도 세울 수 없다. 시민 다수가 문화행사를 열더라도 60일을 넘겨선 안 된다.
그런데 반올림은 이곳을 제집 마냥 쓰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경찰에 집회 신고를 마친 합법적인 집회로 보이지만, 이들 제재 조항을 적용하면 모두 걸릴 수밖에 없는 불법 집회인 것이다.
이재교 세종대 교수(서울국제법무법인 변호사)는 "현행 집시법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이기 때문에 만능이 될 수 없다"며 "다른 법을 위반했다면 당연히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