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소재기술-ICT' 등 272개 과제 연구비 지원"국가 경쟁력 향상 위한 적극적 지원…당장 이익보다 미래기술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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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실에 누워있는 한 남자. 머리에는 수십 개의 센서가 붙어있다. 10년 전부터 치매를 앓아온 남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그의 옆에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여자가 서있다. 주치의다. 그녀는 남자의 뇌 안에서 나오는 기억흔적을 영상화하느라 분주하다. 모든 과정은 실시간 처리된다. 뇌에서 나온 기억흔적들은 시간대별로 분류된다. 모니터에 앳딘 여자의 얼굴이 흐른다. 남자의 첫사랑이다."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상황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박혜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조교수와 연구팀이다. 이들이 연구하는 '살아있는 뇌 안의 기억흔적 영상기술'은 삼성미래기술육성을 대표하는 기초과학 연구로 발탁됐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과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센터가 지난 29일 하반기 자유공모 지원과제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기초과학, 소재기술, ICT 분야를 대표해 28개의 과제가 선정됐다. 

    해당 연구는 살아있는 동물의 뇌 세포에서 발현되는 Arc 유전자를 실시간으로 영상화하는데 집중돼있다. 박 교수는 "우리들의 연구는 뇌 기억 형성과 저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풀기 위한 연구"라고 설명했다. 

    Arc 유전자는 장기적인 기억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신경세포 안에 자극이 들어오면 3~5분 내에 Arc 유전자가 활성화되고 뒤이어 Arc mRNA 유전자가 발생한다. Arc mRNA는 초기발현 유전자 가운데 하나로 학습이나 기억과 관련해 분자 기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기억흔적 세포를 찾기 위해 Arc mRNA 유전자를 연구하고 있다. 대부분이 뇌 조직을 고정시키고 Arc mRNA를 형광물질로 표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관찰에는 형광 현미경이 활용된다. 이같은 방법은 실험동물이 죽은 후에만 이용할 수 있어 제한적인 실험 결과만 도출할 수 있다.

    박 교수의 연구는 여기서 시작됐다. 박 교수는 살아있는 생쥐의 뇌 안에 있는 Arc mRNA를 형광단백질로 표지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에 따라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살아있는 생쥐의 뇌를 관찰할 수 있다. 모든 과정은 이광자현미경(two-photon microscope)으로 진행된다. 기억흔적의 변화 양상을 규명하는데 한 단계 가까워진 것이다. 

    연구는 치매 등 신경질환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당장 실용화보다는 뇌 안의 장기적인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고 저장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의 기억을 영상화하는 것이 목표다. 다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비 지원을 결정한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은 박 교수의 연구에 대해 "치매나 파킨슨병과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진단과 맞춤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신경 퇴행성 질환 연구를 진행하는 삼성메디슨, 삼성전자 의료기기사업부, 삼성바이오로직스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당장의 이익이 중요한 기업에게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위험요소로 작용한다. 연구의 성공여부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돈으로 연구를 산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은 전체 선정과제 중 절반에 해당하는 14개를 기초과학 분야에서 선정했다. 박 교수의 연구를 포함해 단 맛 인지 분자 기작의 이해(조윤제-포스텍), 온도 변화 인지 기작의 새로운 고찰(안지훈-고려대) 등 주제도 다양하다.

    한편 삼성은 2013년부터 272개 과제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2023년까지 1조5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다. 국가 미래기술 육성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메모리 구조를 연구하는 한 대학교수는 "삼성의 미래기술육성 프로그램은 학계에선 이미 유명한 사업"이라며 "삼성의 지원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해외와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