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이어 무인자동차, 인공지능 닥터의 출현 등 끝을 모르고 파고 들어오는 인공지능의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급살을 탄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이달부터 국내에도 인공지능(AI) '왓슨'을 활용한 암 환자 진료가 시작돼 의료 현장의 변화가 주목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정확하고 세밀한 판단력과 의사 결정 능력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통해 입증하고 인정받았다. 인공지능의 무엇보다도 막강한 강점은 방대한 데이터 소화 능력이다.
환자의 증상을 바탕으로 한 진단과 치료, 관리 등을 다루는 의학이야말로 수없이 많은 경험적 통계가 가장 핵심을 이루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왓슨은 2012년부터 미국 최고의 암센터로 꼽히는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와 앰디앤더슨 암센터 등에서 의사들과 함께 암 환자를 진료하며 실제 레지던트 의사와 같은 훈련을 받았다.
또 300개 이상의 의학 학술지와 200개 이상의 의학 교과서를 포함해 1500만 페이지에 달하는 의료정보를 학습했다. 이를 통해 왓슨은 이미 실제 의사와 각종 암에 대해 90% 이상 일치하는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암 진단 뿐만 아니라, 병리학적, 영상의학적으로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어려운 질환의 진단에 있어서 '딥러닝'의 기술을 통해 기존에는 판독이 어렵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던 분야를 손쉽게 해결해 준다.
기존에는 일일이 데이터를 수치화해 입력하면 컴퓨터가 처리하는 방식이었지만, 딥러닝 기술을 가진 컴퓨터는 많은 데이터를 주면 스스로 이해하기 쉬운 패턴들을 발견해 정보를 처리한다.
폐포 사이의 조직인 '간질'이 손상돼 염증이 발생하고 조직이 딱딱해지는 섬유화가 일어나는 DILD는 CT 영상의 음영을 보고 진단을 시작한다. 하지만 정상 부위를 비롯해 6가지 음영 형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영상의학과 의사들도 정확한 판독이 쉽지 않다.
서로 다른 의사가 판독하면 70% 정도만 일치하고, 같은 의사가 여러 번 봐도 매번 편차가 있을 정도다. 이런 DILD 영상 판독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등판한 구원투수가 AI다. CT 영상 위에 다채로운 색이 입혀지기 시작하면서 6가지 음영 패턴별로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되고, 각각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수치로 표시해준다.
나아가 병변이 어떻게 진행되고 변해 가는지를 그래프로 표시해 주며, 이 영상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영상을 찾아 환자가 어떤 치료를 받았고 예후는 어땠는지 알려준다. 현재의 의료 분야처럼 데이터는 많지만 분석할 사람은 부족한 상황에서 딥러닝 기술을 가진 AI닥터가 수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의사들을 돕는다면 진료의 정확도와 일관성,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낙관론과 함께 인간 의사의 역할과 위상 축소에 바탕한 비관론도 팽배하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기계에 맡길 수 있느냐는 ‘윤리적’ 문제 또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AI의사가 진료의 정확성을 높여 인간 건강에 기여할 수 있으나 인간의사를 대체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진단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왓슨을 사용하지만, 그 판단에 따른 책임은 당연히 의사에게 귀결된다. AI와 인간 의사의 판단이 다르거나 오류를 범했을 때, 인간 의사만이 '게이트키퍼' 역할을 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IBM의 왓슨은 단순히 더욱 발전된 의학 교과서 개념이라고 결론지었다.
왓슨은 여러 진료과 의사들이 한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다학제 진료'에서 참여해 한 명의 의사처럼 의견을 낼 전망이다. 길병원은 왓슨을 유방암, 폐암, 대장암, 직장암, 위암 등의 진단에 활용할 예정이며, 한국 의료 가이드라인과 언어에 맞춘 현지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왓슨을 활용해 병원 자체를 'AI 병원'으로 만드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영국은 지난 5월 IBM의 지원을 받아 앨더헤이 아동병원을 영국 최초의 AI 병원으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환자와 보호자를 대상으로 수술 등 치료 행위는 물론 식사와 입원 생활 등 병원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데이터를 취합해 환자의 병원 경험을 개선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을 찾을 계획이다.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인 메드트로닉은 왓슨을 활용해 당뇨 환자의 음식 섭취와 그에 따른 혈당 변화, 인슐린 주입 등의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혈당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혈당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인슐린 주입량과 식단 등을 환자 맞춤형으로 관리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의료 현장에서 환자 데이터를 축적한 왓슨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아내거나 치료제를 개발하는 영역으로도 보폭을 넓힐 전망이다. IBM은 제약사와 의료기기 회사 등과 협약을 맺고 왓슨 중심의 헬스 케어 생태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AI는 짧은 시간에 의사들의 진료 능력을 확장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골고루 세계 최고 수준의 진료를 쉽게 받는 창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IBM과 뉴욕게놈센터(NYGC)는 왓슨을 이용해 암 게놈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다. 왓슨은 암 환자 200명의 DNA 및 RNA 서열과 임상 데이터를 분석해 암을 유발하는 돌연변이를 찾아내고, 이에 맞춘 최적의 치료제를 검색한다.
우리나라는 AI를 구성하는 알고리듬 등 원천기술은 선진국에 뒤져있지만, 이를 채울 콘텐츠, 즉 의료정보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풍부하다. 국내 병원들은 의료진의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전자의무기록(EMR) 도입이 빨라 방대한 진료정보를 쌓아두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전 국민 건강보험 정보까지 더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AI를 만들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단, 현재 국내 의학교육 시스템은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갖춘 의사를 키워내는 데 최적화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AI 닥터 시대에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환자와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의사가 미래에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AI 개발의 핵심인 원활한 데이터 확보와 공유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및 법·제도 개선과 아울러 AI 시대에 필요한 두 가지 역량을 모두 갖춘 의사를 키워내는데 최적화된 국내 의학교육 시스템 변화가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