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시행령③] 재벌해체 노리는 공정거래법 시행령기업집단 지배구조 들여다보려는 정부, "연성법 적극 활용"입법-행정 힘겨루기, 박근혜-유승민 국회법 논란부터 이어져
  • 문재인 정부 출범 6개월이 되던 2017년 11월 2일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 주재로 정부 고위 관료들이 '확대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이날 지각한 김상조 당시 공정위원장은 김 부총리를 보며 "재벌을 혼내느라 늦었다"고 말해 주위를 술렁이게 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 직전 국내 5대 그룹 최고경영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주 화두는 정부가 지주회사의 수익구조의 실태를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논란의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 꼼수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재벌 개혁? 재벌 해체가 목적

    공정위가 내놓은 '독점규제·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기업집단 현황공시 개정안'은 기업집단에 대한 시장감시를 강화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은 손자회사에 대한 공동출자 금지,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지주회사의 대규모 내부거래 이사회 의결 및 공시 강화 및 위반행위에 대한 과태료 부과기준 개선, 자산총액 기준 미달 지주회사의 지위상실 규정을 담았다.

    기업집단 현황공시 개정안 역시 자·손자·증손회사간 경영컨설팅 및 부동산 임대차 거래현황 항목을 신설, 연 1회 공시사항으로 규정하는 내용으로 대기업집단의 지배 및 수익구조를 들여다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업 지배구조가 복잡해지면 각종 불법행위를 추적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계열사 한 곳이 부실해질수 있어 손자회사 한 곳에 자회사 한 곳만 출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 ▲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 두번째부터), 조정식 정책위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달 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 두번째부터), 조정식 정책위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달 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명분은 기업이 튼튼한 하나의 사업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재계는 사실상 재벌 해체 수순을 밟는 것이라 보고 있다.

    오히려 공동출자를 허용하는 경우 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에 따른 비용 감소로 지주회사 전환이 증가해 기업 소유-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손자 회사에 대한 공동출자 금지 등 지분관계가 강화되면, 이미 지주회사제 전환이 완료된 LG, SK 등 많은 재벌들이 주력 회사가 아닌 계열사 지배력이 약해지고 결국 회사를 처분해야 하는 상황까지 우려된다.

    법 안되면 연성법으로… 시행령 개정 노골화

    정부는 야당과 재계의 격한 반발에도 시행령 개정 강행을 공언하고 있다.

    이 같은 정부 행보는 文정부 취임 첫해 꾸려진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자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하위법령 개정만으로 이행 가능한 국정과제를 적극 발굴해 연내 개정 완료를 추진하겠다"고 천명한 이후 2년간 발빠르게 진척됐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공정경제 달성수단은 다양하다"며 "공정거래법 등 사전규제만 고집할게 아니라, 유연한 하위법령, 연성법령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

    지철호 공정위 부위원장도 "마냥 법 개정만을 기다릴 수 없다"며 "하위규정 개정을 통해서라도 시급히 추진해야 할 과제를 추진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지"라고 했다.

    공정위는 2개 시행령의 입법(행정)예고 기간 중 이해관계자, 관계부처 등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12월부터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 ▲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 두번째부터), 조정식 정책위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달 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점점 멀어지는 입법과 행정… 국민 재산권 기업 경영권 위험

    법개정을 둘러싸고 입법부인 국회와 행정부인 정부가 힘겨루기를 벌인 역사는 뿌리가 깊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발점이라 평가되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의 '국회법 다툼'은 국회와 정부 파워게임의 절정이었다.

    당시 유 원내대표는 야당인 민주당이 제안한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수용하고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국회가 정부의 행정입법에 대해 수정권한을 갖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만약 이 법안이 공표까지 됐다면, 지금의 시행령 개정꼼수는 동력을 크게 약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유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라고 몰아붙이며 거부권까지 행사했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놓고 정부와 야당이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대치 국면이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

    결과적으론 박 대통령 거부권 행사 이후 국회가 정부의 하위법령 행정입법을 견제할 수단은 사실상 없다. 국회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국회 의견을 관련 부처에 전달하는 '검토 보고서' 수준이다.

    문제는 이 같은 입법·행정부의 엇박자로 파급되는 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과 기업의 피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국가회계관리시스템(에듀파인)을 사립유치원에 강제로 사용하게 하는 유아교육법 시행령이나, 경제사법의 취업을 제한하는 특경법 시행령 등은 국민의 재산권 및 직업 선택 자유 등 헌법을 위반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입법부의 논의를 원천 차단한 채 사실상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으로 국민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문제다.

    한국당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정감사에서 야당에게 큰 소리치는 세상"이라며 "입법부와 행정부의 단절이 더욱 깊어지면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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