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국익·인재양성 중심 경영철학 "수송으로 나라를 이롭게하라"… 오늘날 회사 기틀 마련
  • ▲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 한진그룹
    ▲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 한진그룹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진그룹의 ‘수송보국’ 경영 철학이 재조명 받고 있다.
     
    조중훈 창업주는 1945년 11월 인천에 설립한 한진상사로 그룹의 밑바탕을 마련했다. 그의 경영철학 수송보국은 ‘수송업을 통해 나라에 이바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 창업주의 ‘수송보국’ 이념은 당시 부실기업인 대한항공 인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조 창업주는 인수 당시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경영이념은 故조양호 선대회장을 거쳐 지금의 조원태 회장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그룹의 핵심 DNA다.

  • ◇ 고난 속에서 넓힌 견문… 한진그룹의 밑거름이 되다
     
    조중훈 창업주는 1920년 2월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조명희 선생과 태천즙 여사의 4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조중훈 창업주는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경남 진해의 해원(海員)양성소를 선택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일본 고베에 있는 조선소의 수습생으로 발탁돼 열일곱 어린 나이에 해외로 나갔다.

    조 창업주는 낮에 조선소에서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하숙방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사정이 어려워 헌 책방에서 고서를 빌려 침을 발라가며 읽다 폐결핵을 앓은 사연도 있다.

  • ◇트럭 한대로 시작한 한진상사… 성공의 원천은 ‘신용’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인천항에는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운동화, 양복, 밀가루 등 생필품들이 밀려 들었다.
     
    그 해 11월 1일 조중훈 창업주는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을 모아 트럭 한 대를 장만하고,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새긴 것으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조중훈 창업주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업 초기부터 조중훈 창업주가 중요시 여긴 것은 ‘신용’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상사는 사업 시작 5년 만에 종업원 40여명, 트럭 30여대를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던 중 발생한 한국전쟁은 한진상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차량과 장비들은 군수물자로 동원돼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조 창업주는 인천으로 돌아갔다. 다시 찾은 옛 터에는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빚만 남아 있었다.
     
    조중훈 창업주는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앞선 사업으로 관계를 맺은 투자자들에게 무담보로 대출을 받고, 예전 단골 고객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55년 쯤에는 한국전쟁 이전의 사세를 회복했다.

  • ▲ 73년 5월 한국항공 보잉 747점보기 태평양 노선 취항식에서 조중훈(왼쪽 네번째)회장이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번째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 한진그룹
    ▲ 73년 5월 한국항공 보잉 747점보기 태평양 노선 취항식에서 조중훈(왼쪽 네번째)회장이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번째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 한진그룹

    ◇ 땅에서 하늘로… 그룹 성장 이끈 ‘월남전 미군 물자 수송사업’
     
    조중훈 창업주의 ‘신용’으로 이룬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냈다. 1957년 1월에는 자본금 1000만환의 ‘한진상사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당시 대한민국 경제 1번지라 불렸던 소공동 반도호텔에 사무실도 열었다. 1960년에는 한 해 220만달러의 외화를 벌고, 500대의 보유차량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60년은 한진이 하늘로 사업 영역을 넓힌 해다. 1960년 8월 15일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의 꿈을 바탕으로 4인승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 설립 신고도 냈다.

    당시 정부는 국영기업인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전폭 지원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한국항공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1961년 8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을 오가는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이 한진고속의 시초였다.
     
    이후 조중훈 창업주는 월남전 군수품 하역이 엄청난 사업 기회인 것을 깨달았다. 1966년에는 주월 미군 사령부와 790만 달러에 달하는 군수물품 수송계약을 체결했다.

    한진상사는 그 때부터 1971년까지 5년간 총 1억50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 ▲ 1969년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 한진그룹
    ▲ 1969년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 한진그룹

    ◇ 대한항공공사인수, 한진그룹의 기틀이 되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0년대 말부터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사업 확장도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부문에 집중해 추진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7년 7월 대진해운을 창립하고, 사업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를 인수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까지 향했다. 1977년 5월 조중훈 회장은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조선업으로 눈을 돌렸다. 조 창업주는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를 인수해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했다.
     
    ◇ 기업의 사회적 역할은 ‘인재양성’… 사재 털어 지원
     
    조중훈 창업주가 가장 강조했던 기업의 사회적 역할은 인재양성이었다. 이에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하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해, 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이끌었다.
     
    조 창업주는 사재의 일부인 1000억원 가량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했다. 그 중 500억원은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세 곳에 배분했다.

  • ▲ 제주 비행훈련원에 방문한 조중훈 창업주 ⓒ 한진그룹
    ▲ 제주 비행훈련원에 방문한 조중훈 창업주 ⓒ 한진그룹

    ◇ ‘수송거목’ 조중훈 회장의 경영철학… “사업은 예술이다”
     
    평소 조중훈 창업주는 “예술가의 혼과 철학이 담긴 창작품은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도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서 “사업은 예술과 같다”고 강조했다.

    좋은 작품이 개성, 창의력, 균형을 고루 갖췄듯 기업의 발전도 국민경제와 조화를 이뤄야한다고 강조했다. 조 창업주는 한 평생 이러한 경영철학과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해왔다. 이 같은 조 창업주의 경영철학은 2002년 그가 타계한 후에도 한진그룹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