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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마이너스(-)에 근접한 소비자물가 하락과 경제활동 침체로 한층 짙어진 디플레이션(수요 부진으로 인한 경기침체) 우려와 관련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다만 국제유가 하락이 앞으로 인플레이션에 추가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우리 경제와 관련해선 석달 연속으로 경기 위축이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직 '부진'이란 표현을 쓰진 않았다. 다만 대외수요와 관련해선 부진이 가시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KDI는 12일 내놓은 경제동향 5월호에서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경기 위축이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3월 소매판매업과 서비스업 생산이 급감하고 4월 소비자심리지수가 내림세를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소비를 중심으로 내수가 빠르게 얼어붙는 가운데 대외수요마저 위축해 지난달 수출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부연했다.
KDI는 올들어 1·2월호에선 경기 부진이 완화하고 있다고 봤지만 코로나19가 본격 확산하면서 지난 3월부터는 "경기 위축이 심화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KDI는 서비스업에서 제조업으로 코로나19 영향이 확산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제조업 계절조정 기업 경기실사지수(BSI)가 3월 56에서 4월 49로 비교적 큰 폭으로 떨어져 부진이 심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조업 출하는 내수(-1.4%)가 감소하고 수출(10.2%)이 증가해 3.5%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조업일수를 감안하면 부진한 모습이라고 판단했다.
최근 코로나19가 서비스업을 넘어 제조업도 위협한다는 것은 통계가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 지난 8일 통계청이 발표한 제조업 국내공급동향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오프라인 소비활동이 얼어붙으면서 올 1분기 제조업 중 소비재 국내 공급은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지난달 28일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3월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를 보면 제조업의 경우 종사자 수가 1년 전보다 1만1000명 줄었다. 코로나19 여파가 서비스업종에 국한하지 않고 제조업으로 번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들이다. -
KDI는 대외수요 부진이 가시화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 수출국의 이동제한 조처가 진행 중이어서 대외수요 부진이 당분간 지속할 거라고 봤다. 주요국의 경기 관련 지표와 선행지수가 급락하면서 세계 경제의 침체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평가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악재인 셈이다. 4월 수출금액은 1년 전과 비교해 24.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평균 수출액도 17.4% 줄었다.
국제유가는 경기 침체로 원유 수요가 크게 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공급 확대 우려마저 지속돼 큰 폭의 내림세를 나타냈다고 KDI는 설명했다. KDI는 코로나19발 수요 부진과 주요 산유국 간 갈등으로 저유가 흐름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설비투자는 기저효과 등이 반영돼 완만한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코로나19 불확실성이 지속됨에 따라 기업 투자심리가 악화해 앞으로는 제약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서비스업 생산은 숙박·음식점업(-52.9%)과 예술·스포츠·여가서비스업(-45.9%) 등을 중심으로 급감했다. -
KDI는 소비 위축도 심화한다고 밝혔다. 3월 소매판매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 줄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면세점과 백화점 판매액이 많이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4월 소비자심리지수도 70.8로, 앞선 달(78.4)보다 내렸다.
근원물가 내림세로 디플레이션 우려를 낳는 소비자물가와 관련해선 국제유가 하락폭 확대를 우려하면서도 일시적인 현상으로 평가했다. 4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0.1% 상승하는 데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근원물가인 '식료품 및 에너지제외지수'는 지난해보다 0.1% 올랐다. 지난해 11월 0.5%, 12월 0.6%, 올 1월 0.8%로 상승 폭이 커지다 2월(0.5%) 이후 둔화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인 1999년 12월(0.1%) 이후 20년4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근원물가는 원유나 농산물처럼 공급 측 요인에 의해 가격이 널뛰는 품목을 빼고 산출한 물가 상승률이다. 최근 5년간 근원물가 상승률은 2015년 2.4%, 2016년 1.9%, 2017년 1.5%, 2018년 1.2%, 2019년 0.7%를 기록했다. 추세적 하락 흐름을 보인다. 일각에선 코로나19발 소비 위축이 근원물가 내림세를 가속해 디플레이션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KDI는 일단 디플레이션은 아니라는 견해다. 4월 소비자물가가 마이너스를 앞두고 있지만 낮은 물가상승률은 주로 국제유가 하락과 무상교육 확대에 기인했다는 판단이다. 이는 재정당국의 판단과 궤를 같이한다. KDI는 "4월의 낮은 인플레이션은 서비스업 경기 위축에 석유류 가격과 고등학교 납입금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부연했다. 다만 KDI는 4월 국제유가(두바이유 기준) 하락 폭이 -49.6%에서 -71.3%로 확대해 앞으로 추가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유가가 조금씩 오르고 세계경제가 활력을 찾느냐가 디플레이션 여부를 결정할 가늠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로 해석된다.